군대는 늘 춥고 배고프다. 아무리 껴입어도 춥고 많이 먹어도 뒤돌아서면 금세 배가 꺼진다. 그래도 춥고 배고픈 건 견딜 수 있다. 맥락 없이 터져 나오는 선임의 폭력·욕설·얼차려에 비하면 말이다. 20여 년 전 군 복무 시절 내무반에는 ‘계급이 깡패’라고 생각하는 선임들이 넘쳐났다. 전시에 원활한 지휘 통솔을 위해 만든 계급이 후임에게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맞닥뜨릴 때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가 선임이 되면 당한 만큼 돌려줄 거야’라는 분노감과 ‘난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이성적 감정이 교차한다.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까운 건 전자다. 부여된 권력은 휘두르고 싶기 마련이다. 입대할 때 사람 좋던 동기가 선임이 돼서는 괴물로 변하는 경우도 종종 봤다.
부조리를 바꾸는 건 분노가 아닌 이성의 힘이다. ‘나는 당했지만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후임들이 분노로 가득 찼던 선임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군 문화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악순환을 없애려면 고리를 끊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군에서 깨달았다.
군 시절이 떠오른 건 최근 불거진 국민연금의 관치 논란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금융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과거 정부 투자 기업 또는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하면서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은 스튜어드십(코드)이 작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기금 등이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투명한 경영을 유도하는 지침이다.
재계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해 기업 지배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한다. 기업명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KT와 포스코홀딩스의 최고경영자(CEO)를 겨냥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공정한 기준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전제는 정부를 포함한 어떤 세력으로부터 독립돼 철저히 수익률의 관점에서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달리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독립성을 포기하는 순간 정권에 입맛에 따라 휘둘리기 좋은 구조다. 국민연금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할 때 정권 지시를 받고 의결권을 행사했다가 큰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정권이 바뀌면 개국 공신을 앉히고 싶은 게 권력의 속성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절제된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 소유 분산 기업이 ‘주인 없는 기업’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다. 포스코와 KT는 외국인 지분율이 50%에 육박하는 글로벌 기업이기도 하다. 포스코는 최정우 회장 아래서 최악의 태풍 침수 피해를 6개월여 만에 극복했고 철강에 쏠렸던 사업 구조를 2차전지 소재 등으로 다변화하는 데 성공했다. KT도 2020년 구현모 대표 취임 이후 지난해 25조 원이라는 사상 최대 매출 실적을 기록했다. 기업가치가 떨어졌거나 내부 통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주주들이 먼저 들고일어났을 거다.
그래도 회사의 지배구조가 문제라면 명확한 근거와 기준을 제시하고 주주들의 설득을 얻어내면 될 일이다. 주주총회에서 CEO의 연임에 반대표를 던지거나 주주 제안 형태로 이사진을 교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계급이 깡패’라던 군대 문화도 결국 바뀌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에도 그랬다’는 이유로 국민연금을 동원하려는 유혹. 이번만큼은 그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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