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탄소배출권을 사기 위해 쌓아 놓는 부채가 지난 1년 사이에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불황으로 제조업 가동률이 급감하면서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재무 부담은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향후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시행되고 우리나라 탄소배출권 유상 할당 비중이 확대된다면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기업들의 재무 부담이 중장기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9일 산업계에 따르면 포스코홀딩스의 지난해 온실가스 배출부채는 142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1년(844억 원)보다 83%나 급감한 액수다. 포스코홀딩스 관계자는 “그룹 차원의 탄소 감축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지만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 수해로 포항제철소가 침수 피해를 입은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포항제철소가 침수 피해를 완전 복구하기까지 135일이 걸렸다.
현대제철의 배출부채는 2021년 136억 원이었지만 지난해에는 4억 원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450억 원→328억 원), 에쓰오일(118억 원→19억 원), 한국전력(6555억 원→2989억 원)의 배출부채도 감소했다.
정부는 2015년 탄소배출권거래제를 도입한 후로 매년 기업들에 연 단위 배출권을 할당해오고 있다. 그러나 만약 기업들이 할당량보다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했다면 외부에서 탄소배출권을 사와야 한다. 여기서 탄소배출권을 구매할 때 실제로 들었거나 예상되는 비용이 배출부채로 잡힌다.
배출부채는 2020년도 들어 급증세를 보였다. 제도적 요인이 컸다. 정부는 배출권거래제 제 1차 계획 기간인 2015~2017년에는 배출권을 전부 무상으로 제공했다. 하지만 2차 계획 기간( 2018~2020년)에는 유상 할당 비중을 3%로 늘렸고 3차 계획 기간(2021~2025년)에는 10%까지 확대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탄소배출권을 할당받은 상장법인 중 상위 30곳의 배출부채는 2018년 4451억 원에서 2021년 8357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지난해에 배출부채가 급감한 것은 경기 침체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 인플레이션 등 다양한 요인으로 제조업 가동률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지난해 1월 79.7%로 정점을 찍은 뒤 올 1월 70.9%로 떨어졌다. 기업들이 보유한 탄소배출권을 초과해 온실가스를 배출할 가능성이 줄어든 것이다.
가동률 부진은 탄소배출권 가격으로 이어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2년 탄소배출권(KAU22) 가격은 지난해 7월 2만 9000원에서 올해 3월 1만 3000원대로 하락했다. 탄소배출권 가격이 떨어지면 향후 온실가스를 할당량보다 추가 배출한다고 해도 기존보다 저렴한 가격에 탄소배출권을 살 수 있어 배출부채 감소에 영향을 준다. 김녹영 대한상공회의소 탄소중립실장은 “기업들의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탄소배출권 수요가 감소한 측면이 있다”며 “그 영향으로 탄소배출권 가격도 하락하면서 기업들의 배출부채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올해까지는 경기 침체로 탄소배출권 가격과 배출부채 부담이 높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다만 국내외에서 탄소 중립 규제가 강화되고 있어 중장기적으로는 온실가스 배출이 재무에 끼치는 영향이 점차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SK증권은 “2026년부터 시행되는 제 4차 배출권거래제 계획 기간에는 탄소배출권 할당 대상 업종이 늘고 유상 할당 비율이 올라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CBAM 시행을 앞두고 국내 배출권 가격 상승도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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