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국무회의에서 지난달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법률안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월 취임한 윤 대통령이 행사하는 첫 법률안 거부권이자 지난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이후 7년 만에 행사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즉시 공포를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어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3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오는 4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양곡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 심의·의결 절차가 이뤄질 예정이다. 윤 대통령이 해당 재의요구안을 재가하면 법안은 국회로 돌아간다. 대통령은 정부로 이송된 법률안을 15일 이내에 서명·공포하거나 이의가 있을 시 국회에 재의 요구를 해야 한다. 지난달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양곡법 개정안은 같은 달 31일 정부에 이송됐다.
윤 대통령이 11일 열릴 국무회의에서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실에서는 윤 대통령이 해당 법안에 대해 헌법이 보장한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방향을 정한만큼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내고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당정협의를 한 결과, 이번 법안의 폐해를 국민들께 알리고 국회에 재의 요구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며 “정부는 차마 실패가 예정된 길로 갈 수 없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시장의 수급조절 기능 마비 △미래 농업 투자 재원 소진 △식량 안보 약화 △2011년 태국의 실패 사례 등 부작용을 설명하며 "시장 원리를 거스르는 ‘포퓰리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다수의 농민단체가 관련 입장을 밝혔고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이 거부권 행사를 건의한 만큼 대통령실로서는 충분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쳤다는 판단도 하고 있다.
민주당 주도로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양곡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수요에 비해 3~5% 이상, 수확기 쌀값이 평년에 비해 5~8% 이상 하락하면 정부가 초과 생산량 전량을 의무 매입하게 강제하는 법안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해당 법안이 강행 처리되자 “(윤 대통령에게)거부권을 제안할 계획”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했다. 정 장관은 법안이 통과된 당일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개정안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정부는 매년 기존에 사들인 100만톤 이상의 쌀을 보관하고 관리하는데만 3000억~4000억원의 재정을 쓰고 있다. 여기에 법안이 시행되면 정부는 연간 1조원 규모의 혈세를 또 쌀을 사는데 써야한다. 정부는 이 돈을 스마트팜이나 청년농 육성과 같이 미래세대를 위한 농업생산성 향상에 써야한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정부는 민주당이 통과시킨 양곡법 개정안이 천문학적인 재정부담은 물론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에도 해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농식품부는 법안이 시행되면 쌀 소비가 대폭 늘거나 쌀 생산량이 크게 줄지 않는한 2026년 1조원, 2030년 1조 4000억원 이상을 쌀을 의무매입하는데 써야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WTO는 농업보조금 총액(AMS)을 1조 4900억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현재도 정부는 필요한 경우 시장에서 남는 쌀을 매입하고 있다”라며 “개정법안에 따른 무제한 매입 방식은 쌀 생산을 더욱 부추기게 되고 종국적으로 쌀 과잉 물량이 계속해서 증가해 (쌀 매입을 위해)점점 더 많은 재정이 소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법안은 국회로 돌아간다. 이 법안을 다시 의결하려면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3분의 2 이상 찬성이라는 더욱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그럼에도 국회에서 재의결될 경우에는 해당 법률안은 법률로 확정되고 정부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 재적 의원(299명) 중 국민의힘 의원 수가 3분의 1(115명)을 넘기 때문에 재의결될 가능성은 낮다.
야당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맞서 추가 입법을 해서라도 양곡법의 취지를 관철하겠다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제주 4·3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에서 "윤 대통령은 양곡관리법을 농민과 민생을 위한 입법이 아니라, 오로지 야당과의 대결 수단으로만 보고 있다"며 "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가 아니라 즉시 공포"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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