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한국전력이 5조 6000억 원이 추가된 총 25조 7000억 원의 자구안을 내놓았다. 한전 입장에서는 마른 수건 짜듯 당장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꺼낸 셈이지만 시장에서 예상했던 수준이라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혹독한 자구책을 요구했던 정치권에서 미흡하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한전의 1분기 실적은 왜 전기요금 인상이 화급한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 한전이 시장 컨센서스보다 9000억 원이나 많은 6조 1776억 원의 영업적자를 낸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2021년 이후 한전의 누적 적자는 44조 원을 돌파했다.
에너지 업계는 한전의 충격적인 1분기 실적이 되레 ‘예상됐던 수준의 자구안’이라는 일각의 비판 여론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뜩이나 한전의 투자 여력 축소에 따른 하청 일감 부족 등으로 전력 생태계 훼손에 대한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인 만큼 전기료 인상이 절박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점은 그나마 위안거리다.
일단 정승일 한전 사장과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이날 오전 각각 ‘비상경영 및 경영 혁신 실천 다짐 대회’를 열고 자구안을 공개했다. 한전의 경우 총 25조 7000억 원, 가스공사는 15조 4000억 원으로 두 기업을 합치면 총 41조 1000억 원의 재무 개선 효과가 예상된다.
처방전은 비슷했다. 간부급 이상 임직원의 급여를 동결하고 설비투자를 줄이거나 늦추며 돈이 될 만한 것은 전부 파는 것이다. 지하에 배전 시설이 있어 매각이 용이하지 않은 여의도의 남서울지역본부까지 동원됐다. 강남의 교통 요충지에 들어선 한전아트센터 3개 층과 서인천지사 등 10개 사옥은 임대 물건으로 나왔다. 234곳에 달하는 지역사업소는 170여 곳으로 구조 조정하고 중복 인력을 전력 설비 건설 분야, 해외 원전 건설 분야에 재배치해 인력 운영의 효율성도 높이기로 했다. 한전은 필수 증가 소요 인력을 1600여 명으로 내다본다. 한전은 이날 발표된 자구안에 대해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자구 노력’이라고 애써 의미를 부여했다.
가스공사도 이날 15조 4000억 원의 자구안을 발표했지만 추가된 금액은 1조 4000억 원에 그쳤다.
이는 전기·가스요금 인상 없이 자구 노력만으로는 경영 정상화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한전이 발표한 자구책에는 정부가 전면 재검토를 시사한 한전공대 출연금 삭감 같은 내용이 빠져 있다는 이유에서 후속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한다.
문제는 리더십 부재를 용인할 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한전은 올 1분기 매출액이 21조 5940억 원, 영업손실은 6조 1776억 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 지난해 1분기의 영업적자(7억 7869억 원)나 지난해 4분기(10조 8209억 원)와 비교해 적자 폭이 줄었으나 컨센서스(5조 2990억 원)는 상회했다. 8분기 연속 적자 행진으로 지난해 1분기부터는 5분기 연속 5조 원 이상 적자다. 영업비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연료비와 전력 구입비가 각각 9조 830억 원, 12조 179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18% 늘어난 게 결정타였다. 한전은 “전기 판매량이 2% 줄었지만 지난 1년 동안 네 차례 전기요금, 연료비 요금을 조정하면서 적자 폭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남서울본부 매각과 양재 아트센터 임대는 임기응변이자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라며 “매각 이후에 재임대하는 경우 오히려 중장기적으로는 더 큰 자금 유출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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