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 실제로 필요한지를 살피는 예비타당성조사가 진보 정권의 여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에서 집중적으로 면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전체 예타 대상 사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면제를 받았으며 이 중 90%는 지자체장이 여당이었다.
7일 한국재정학회에 따르면 김봉환·정호용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등은 학회 논문집에 실린 ‘예비타당성조사의 정치성 연구’라는 이름의 보고서에서 “예타 당시 정부가 진보 정권일 경우 지역 단체장의 여당 소속 여부가 예타 사업 면제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게 2014년 박근혜 정부 당시 예타 부적격 판정을 받아 사업 진행이 이뤄지지 않았던 총사업비 1685억 원짜리 ‘광양(I) 공업용수도 용수 공급 신뢰성 제고 사업’이다. 이 사업은 2017년 문재인 정부에 와서 ‘단순 개량 및 유지보수 사업’이라는 이유로 예타 면제를 받았다. 총사업비가 1500억 원으로 소폭 줄고 사업명이 ‘광양(I) 공업용수도 노후관 개량 사업’으로 바뀌었을 뿐 사업 내용은 2014년과 동일하며 똑같이 국토교통부에서 진행한 사업이었다.
2018~2019년 문재인 정부 당시 두 차례 예타 대상에 올랐던 울산 소재 산재 전문 공공병원 설립 사업의 경우 울산시장이 야당 소속이었던 2018년에는 예타 부적격 판정을 받아 추진되지 못했다가 2019년 울산시장이 여당 소속으로 교체된 뒤 ‘국가 정책적 추진 사업’이라는 이유로 면제 사업으로 재분류됐다. 총사업비도 2018년 부적격 판정 당시 1776억 원에서 면제 당시 2333억 원으로 상승했다.
김 교수는 “울산 산재 전문 공공병원 설립 사업은 광역단체장의 여당 소속 여부가 실제 정치적 연결 고리로 작용한 사례”라고 밝혔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에서 예타를 면제받은 사업 147개 중 90.5%에 달하는 133개는 지역 단체장이 여당인 경우였다. 이때 ‘같은 식구’를 챙기는 경향은 진보 정권에서 더 강했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경우 지자체장이 여당이어도 예타 사업 면제가 미미하지만 감소하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여당 소속 지역 단체장 아래서 예타 면제를 받은 사업 비중은 이명박 정부에서 전체 면제 사업의 73.3%(66개), 박근혜 정부에서 69.0%(60개)로 모두 70% 내외 수준이었다.
큰 틀에서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지만 진보 정권에서의 뚜렷한 증가 경향성과 대비된다는 게 저자들의 판단이다.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에서는 10조 원을 면제 사업으로 활용했는데 이는 14년 동안의 예타 면제 전체 사업 규모인 190조 원의 60%에 가까운 규모”라며 “보수 정부보다 진보 정부일수록 예타 면제 사업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발견됐다”고 짚었다.
이들은 또 단체장이 여당일 경우 복지 사업의 예타 면제 경향성이 명확하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논문이) 진보 정권의 지출 확대 경향성, 특히 복지 지출 경향성이 더 크다는 일반적인 논의를 주장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면서도 “실제 예타 면제 사업이 확대된다는 것을 통계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입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예타 대상 사업 수가 391개로 문재인 정부보다 많았지만, 이 중 면제를 받은 사업은 90개에 그쳤다. 박근혜 정부의 예타 면제 사업 역시 87개로, 두 보수 정권 모두 예타 면제 대상 사업이 100개를 밑돌았다.
저자들은 예타 면제 사유에도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기획재정부는 예타 운영 지침에서 면제 사업 선정 사유를 총 10호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중 울산 산재 전문 공공병원 설립 사업의 예타 면제 사유로 쓰이기도 했던 ‘제10호(국가 정책적 추진 사업)’는 정치적 이해가 개입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제10호는 규정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예타 면제 사업 선정에 다양한 정치적 이해 관계자의 재량적 판단이 개입될 수 있는 통로로 작동할 수 있다”며 “예타 면제 여부에 있어서 합리적 판단이 관여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합리성의 틀 안에서 정치성을 고려하는 투명하고 체계적인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