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결국 보는 사람과 창작자의 소통이에요. 그림을 통해 관객들과 더 많은 소통을 하고 싶습니다.”
맷돌 손잡이를 잡듯 에나멜 수성펜을 움켜쥔 도톰한 손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선을 긋기 시작하자 10분도 되지 않아 뚝딱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발달장애 화가 조태성(25) 작가는 인터뷰 시작 전 기자에게 어떤 동물을 좋아하는지 수줍게 물었다. 호랑이를 좋아한다고 하자 기자의 이름으로 10분 만에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냈다. 가까이서 보면 글자, 멀리서 보면 호랑이 그림이었다. 조 작가의 대표 기법인 ‘글자 그림’이다.
조 작가는 하나금융그룹이 발달장애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전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22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하나아트버스에서 유일하게 4년 연속 입상했다. 특히 올해는 877명 중 대상을 받았다. 올해 입상작인 ‘ZOO(동물원)’는 푸른 아프리카 초원을 떠올리게 하는 들판에 얼룩말과 기린·사자·악어가 평화롭게 노는 모습을 담았다. 평범한 동물 그림이 아니라 얼룩말이라는 글자를 통해 그림을 표현했다. 악어는 멀리서 보면 악어지만 가까이서 보면 글자가 숨어 있다.
조 작가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표현법을 본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하나아트버스 시상식에서 “크게 되겠다”며 “편견 없는 세상에서 꿈을 키워가도록 지원하겠다”고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조 작가는 “작은 생명들이 오래 숨 쉴 수 있게 몸 안에 명칭을 넣고 글자로 만들어진 동물이 동물원에 모인 것”이라며 “글자 동물원이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줍음 많고 조용한 고등학생이었던 조 작가는 2학년 때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다. 공부도 썩 잘해 부산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미대 진학을 꿈꿨지만 정식으로 입시 미술을 배운 적이 없다 보니 합격자 예비 후보 2번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조 작가의 재능은 학교 선생님들이 먼저 알아봤다. 시험지 빈칸이나 빈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심상치 않다며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부산 기장군 장애복지관 씨앗 프로그램을 통해 그림에 입문했다. 당시에는 장애 판정을 받지 않았지만 그림을 좋아하니 한번 가보라는 제안이었다. 조 작가는 1주일에 한번 주제가 주어지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모자이크 기법을 활용해 동물 속에 동물을 그리는 독특한 표현법을 선보였다고 한다. 조 작가의 매니저인 이모 박길웅 씨는 “작품의 공간을 깎는다고 하는데 밑그림 없이 공간을 채워가는 게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가 얼굴의 다양한 곡선을 활용해 과일을 채워갔듯 조 작가는 곡선의 역동적인 느낌으로 동물을 표현한다. 조 작가의 대표작 ‘무소자이크’는 재능을 알아본 이경면 장신대 교수의 추천으로 올해 특수 미술 교과지도서 표지를 장식했다.
조 작가의 작품관은 최근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하나아트버스 대상뿐 아니라 부산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비치코밍’ 행사 포스터도 조 작가의 작품이 채택됐다. 서울로미디어캔버스에는 조 작가가 최근 작업한 3차원(3D) 메타 브러시 작품이 전시됐다. 부산 명지동 ‘스타필드 시티 명지’에서는 작은 미술관 기획전과 세계자폐인의 날 초대 작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 작가는 “관객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전시 기획과 행사, 전시 공간에 대한 갈증이 크다”며 “하나아트버스 같은 행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발달장애 예술인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낼 용기를 가져라”고 조언했다.
조 작가의 작품은 하나금융그룹의 지원으로 8일부터 11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진행되는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 부산 2025’에서 전시된다. 하나금융 을지로 본점 1층 복합 문화 공간이자 개방형 수장고인 하트원(H.art1)에서는 특별 전시가 진행 중이다. 특별 전시 기간에는 하나금융그룹 소속 장애인 아트크루인 하나 아트크루 작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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