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국산업은행에 2000억 원 이상의 자금을 추가로 투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트럼프발 관세전쟁으로 기업들의 자금 수요는 커지고 있는데 산은의 자금 공급 여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8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산은에 2000억 원 이상의 현물을 출자해 자본금을 늘리는 방안을 국회 정무위원회와 논의했다.
정부는 이달 편성한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3000억 원의 자금을 산은에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것만으로는 정책자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정책자금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연내 추가 증자가 필요하다”며 “구체적인 출자 금액은 확정하지 않았으나 추경안에 담긴 산은 출자금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가 증자안이 계획대로 이뤄질 경우 올 들어 산은에만 5000억~6000억 원 안팎의 자금이 투입되는 셈이다.
정부가 추가 증자를 추진하는 것은 산은의 재무 여건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은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2023년 말 이후 14% 선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다가 지난해 말 기준 13.9%까지 떨어졌다. BIS 비율은 자기자본을 대출·투자금 등 위험가중자산으로 나눈 값으로 금융 당국은 은행의 13%를 건전성 유지를 위한 마지노선으로 보고 있다. 산은의 BIS 비율은 수출입은행(15.35%)이나 IBK기업은행(14.74%) 등 다른 국책은행과 견줘 봐도 낮다.
문제는 정부가 산은을 통해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대한 저리 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하면서 BIS 비율 하락 압력이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조달금리보다 낮은 수준으로 대출금리를 적용하도록 설계돼 산은이 일부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 여기에 미국의 상호관세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을 대상으로 관세 대응 저리 대출 프로그램까지 신설하면서 산은의 부담은 더 커졌다. 실제로 두 프로그램을 가동하면서 산은의 BIS 비율은 0.22%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추산된다.
원·달러 환율이 최근 들어 크게 출렁이고 있는 점도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환율이 올라가면 은행이 가진 외화 대출의 원화 환산액이 커진다. 장부상 위험자산이 늘어나는 만큼 BIS 비율을 끌어내리게 된다. 최근 원화 강세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무역전쟁 전개 상황에 따라 언제든 환율이 급변동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산은은 HMM과 한화오션 등 보유 지분을 처분해 자본비율 감소를 최소화하려고 하고 있지만 실제 매각 시점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국책은행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산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만큼 국책은행이 보다 과감하게 정책자금을 집행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재무 건전성이 떨어지면 대출 규모를 조절하거나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정부는 추경으로 확보한 예산에 현물출자까지 더해지면 산은의 BIS 비율이 0.22%포인트가량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소한 저리 대출 프로그램으로 인한 자본비율 하락 폭은 상쇄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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