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주인공의 이름을 앞세운 연극 ‘헤다 가블러’의 성패는 주역 ‘헤다’의 연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LG아트센터가 개관 25주년 기념 공연 ‘헤다 가블러’의 ‘헤다’로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 이영애를 선택한 것은 모험적 시도로 보였다. 한껏 올라간 대중의 기대치에 못 미칠 경우 ‘스타 캐스팅의 폐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7일 막을 올린 ‘헤다 가블러’는 이런 관객의 기대와 불안을 정면 돌파한다. 이영애가 연기하는 ‘헤다’ 대신 ‘이영애의 헤다’를 작정하고 선보이는 방식을 통해서다. 무대 위의 헤다를 실시간으로 클로즈업하는 연출이 대표적이다. 대극장의 거대한 후면 벽을 스크린 삼아 펼쳐지는 친숙한 배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험은 연극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배우를 아는 대중에게는 익숙한 독특한 감상을 안긴다.
배우의 외적 매력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선택도 서사에 설득력을 더했다. 연극은 6개월에 걸친 화려한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헤다가 남편과 전 연인 등을 둘러싼 관계를 휘두르려 하고 또 휘둘리다가 끝내 자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발사하기까지 36시간을 다룬다. ‘헤다’는 모든 남성이 욕망하는 매혹적인 여성이지만 종잡을 수 없는 오만한 성격과 통제 불가능한 욕망, 파괴적인 충동 탓에 주변과 자신 모두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인물이다.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무대 중앙에 서는 것만으로도 “바로 그 헤다”라는 단순한 대사가 이해되는 배우 본연의 매력은 작품의 ‘성격 비극적’ 면모를 가중시키는 힘이 있다.
그렇다고 작품 전체가 주역에만 기대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연극 팬들이라면 김정호·지현준·이승준·백지원·이정미·조어진 배우가 선보이는 군더더기 없는 연기의 합에 더욱 찬사를 보낼 듯 하다. 특히 김정호의 연기로 다시 태어난 헤다의 남편 조지 테스만은 순진무구하고 유쾌한 매력을 뽐내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극장 무대 곳곳을 채운 감각적인 미장센(시각적 연출)도 인상적이다. 공간, 조명, 소품, 음향 등 모든 장치가 복잡한 헤다의 내면을 직관적으로 묘사하도록 기능한다. 예컨대 원작에는 가정집으로 묘사된 배경이 회색 벽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으로 변했는데 “무대조차 헤다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는 게 전인철 연출의 설명이다. 또 중세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의 명화 ‘디오니소스’를 무대 공간에 배치해 헤다의 이해할 수 없는 파괴적 격정을 예술·혼돈·광기 등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적 열망으로 해석하도록 이끈다.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을 덧입혀 ‘자기화’하는 이영애의 연기적 특성상 ‘친절한 금자씨’나 ‘구경이’ 같은 지난 필모그래피가 겹쳐 보이는 것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요소다. 연극 경험이 많지 않기에 첫 공연은 대사 전달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거나 때로는 실수가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배우가 소화했던 모든 캐릭터가 층층이 쌓여 헤다라는 복잡다단한 인물의 배경처럼 보였던 것 또한 극의 서사와 어울렸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호’에 가까웠다. 공연은 6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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