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처리장치(GPU) 3만 장 규모의 국가 인공지능(AI) 인프라가 제역할을 하려면 해외 빅테크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게 관건이라는 전문가 제언이 나왔다. 정부가 국산 인프라를 통해 국내 AI 기업들의 빅테크 의존도를 낮춘다는 취지를 살리려면 실질적으로 기업들이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현모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겸임교수(전 KT 대표)는 1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에서 열린 한국공학한림원·국회미래연구원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지금도 국내 기업들이 아마존웹서비스(AWS) 같은 민간 인프라를 쓸 수 있는데 정부가 ‘국가AI컴퓨팅센터’의 이용료를 높게 받으면 의미가 없다”며 “GPU를 구축하는 게 다가 아니고 이용 접근성을 높여 실제로 민간이 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용료를 낮추기 위해 정부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는 국내 AI 모델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경정예산 1조 4600억 원을 들여 연내 GPU 1만 장을 구매하고 이를 포함해 2030년까지 3만 장 규모의 국가AI컴퓨팅센터를 구축할 계획이다. 하지만 AWS·오픈AI 같은 빅테크 주도로 민간 AI 인프라가 확대되고 있어 공공 인프라인 국가AI컴퓨팅센터는 이용료 할인 등 정부의 추가 지원책으로 가격 경쟁을 따라가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게 구 전 대표의 생각이다.
빅테크는 전 세계 다수의 고객사를 바탕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오픈AI는 올해 20조 원으로 기대되는 매출 성장에도 챗GPT 무료 제공 등으로 2029년까지 적자를 이어갈 전망이다. 구 전 대표는 “국내에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며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가격 경쟁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의 GPU 확보가 전 세계적 수요 급증으로 가격이 오른 이후 비교적 늦게 시작된 것도 국가AI컴퓨팅센터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구 전 대표는 “AI 분야는 정부 입장에서도 도전적”이라며 “(정치권 등이) 면책해줘야 정부도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관련 지원 확대를 유도하려면 정책 실패에 대한 부담을 더는 것도 함께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와 관련해 이날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국내 산학연 등의 GPU 사용 부담은 적정 수준으로 설정할 계획”이라며 “활용기관 규모, 다른 GPU 지원 사업의 자부담 수준 등을 고려해 9월까지 구체적인 부담 수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포함해 연내 GPU 1만 장을 구매하고 사업자를 선정해 서버를 구축해 서비스를 개시하는 ‘첨단 GPU 확보 추진방안’이 확정됐다.
과기정통부는 이와 별도로 GPU 8496장을 동원해 국가 연구개발(R&D) 지원에 특화한 AI 인프라 ‘슈퍼컴퓨터 6호기’를 내년 상반기까지 구축한다. 슈퍼컴 6호기는 현재 기준 세계 6위 수준인 600PF(페타플롭스) 연산 성능을 갖출 예정이다. 5호기(25.7PF)의 23배에 달한다. 5호기와 달리 GPU 위주로 구성돼 초고에너지물리, 기계, 유체, 항공, 기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학습과 추론, 시뮬레이션, 대규모 계산 등 고난도 작업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과기정통부는 이달 12일 휴렛팩커드(HPE)와 3825억 원 규모로 구축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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