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거래소 빗썸과 업비트는 지난달 11일 가상화폐 하이파이(HIFI)에 대해 ‘사업 실재성’이 의심된다며 상장폐지(거래지원 종료)를 결정했다. 반면 또 코인원은 ‘문제’가 해소됐다며 같은 달 25일 거래를 재개했다. 이달 들어서는 가상화폐 위믹스(WEMIX) 상장폐지 여부 논의 대상이 됐다. 그 결과 위믹스에 대해서는 모든 거래소가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하지만 상장폐지 사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에 위믹스는 거래지원 종료 결정을 막기 위한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가상화폐 시장이 커지는 가운데 국내 주요 가상화폐 거래소 모임인 디지털자산거래소공동협의체(DAXA)의 운영 기준이 모호하고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상화폐 시장에 대해 정부가 소극적 대응을 하는 가운데 민간 거래소들이 가상화폐 상장, 상장폐지(거래지원 종료) 등 시장의 핵심 규제 권한을 행사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저해하고 혼선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게임 업계에서는 가상자산을 활용한 새로운 게임 플랫폼 개발 시도가 민간 거래소 모임에 의해 좌초 위기에 놓였다는 점에서 가뜩이나 게임산업에 대한 정부 규제가 큰 상황에서 민간마저 신사업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14일 정치권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는 13일 산하에 디지털자산위원회를 만들고 가상자산을 제도권으로 편입하기 위한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계획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과도한 시장 권한을 갖춘 DAXA의 기능을 분산해 규제 신뢰도를 높이는 내용 등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움직임은 민간 기구인 DAXA가 사실상 규제 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지적 때문이다. 상장폐지 권고에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는 하지만 국내 거래량의 99%를 차지하는 DAXA 소속 거래소 5곳(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 고팍스)의 결정은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상장된 가상화폐 거래로 수익을 올리는 DAXA 소속 거래소들이 상장,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하는 건 선수가 심판 역할까지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022년 설립된 DAXA는 두 번의 위믹스 상장폐지를 비롯해 갤럭시아(GXA), 썸씽(SSX) 등을 퇴출했다.
규제 권한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판단 기준이 들쭉날쭉하고 구체적 사유를 비공개하는 등 신뢰가 부족하다는 문제도 지적된다. 각 거래소 별로 상장된 가상화폐가 다르고 퇴출도 제각각 이뤄진다. 재상장 기준 등도 명확하지 않다. 상장이나 상장폐지를 어떤 경우에 DAXA 또는 거래소 차원으로 결정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상장폐지 결정에 반발해 가처분을 제기한 위믹스재단은 “시장 퇴출과 직결될 수 있는 중요 제재를 정하면서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DAXA처럼 민간 기구가 시장의 규제 기능까지 가진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유럽의 증권시장청(ESMA), 싱가포르의 금융통화청(MAS) 등 대부분 국가는 별도 규제기구가 규제 권한을 갖는다. 일본의 경우 거래소 자율기구인 ‘일본가상통화거래업협회’(JVCEA)가 규제 권한을 갖고 있지만 금융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순수 민간기구인 DAXA와 차이가 있다.
이 같은 기형적 구조의 원인으로는 정부의 책임 회피 탓이 가장 먼저 지적된다. 금융당국은 아직도 가상자산에 대한 법적 지위를 명확하게 확정하지 않고 있다. 변동성이 큰 가상화폐를 직접 관장하기에는 정부의 부담이 큰 탓에 감독 책임을 민간 자율기구에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11월 기준 가상자산 투자자 수가 1559만 명, 일평균 거래대금이 14조 9000억 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규제의 사각지대에 둘 수는 없다는 지적이 힘을 얻는다. 이같은 이유에서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산하 디지털자산위원회는 가상자산을 제도권으로 편입하기 위한 ‘디지털자산기본법’을 제정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하기도 했다.
가상자산과 기존 산업의 융합 시도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으면 기술을 갖추고도 새로운 산업 선점 경쟁에서 낙오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게임 내 재화와 가상자산을 연계해 게임 자산을 실제로 보유 또는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P2E(플레이 투 언) 게임 플랫폼 산업이 대표적이다. 리서치앤드마케츠는 가상자산 게임 시장이 2030년 1097억 달러(약 156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허용되지 않고 있지만 위믹스를 앞세운 위메이드(112040)와 넥슨 등 주요 게임사들이 참전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분야에서 국내 게임사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위믹스 상장폐지처럼 다른 이유로 시장 경쟁력이 위축될 수 있다.
김형중 한국핀테크학회 회장은 “DAXA 같은 비대한 권한을 가진 민간 기구는 전 세계적으로 독특한 사례”라며 “투자자 보호나 시장 신뢰를 위해 DAXA가 가진 상장 및 상장폐지 권한을 공정한 외부 기관에 분산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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