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에서 유래한 고위험 바이러스의 위협이 재조명되는 가운데, 국내 연구진이 다양한 박쥐 종과 장기를 기반으로 한 세계 최대 규모의 오가노이드(유사장기) 실험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 플랫폼은 박쥐 유래 바이러스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감염 경로와 면역 반응, 치료제 반응까지 통합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차세대 연구 시스템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4일 기초과학연구원(IBS) 공동 연구팀이 한국에 서식하는 박쥐로부터 장기 오가노이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해당 연구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됐다.
박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메르스 등 고위험 인수공통 바이러스의 자연 숙주로, 다양한 바이러스를 지니고도 스스로 병에 걸리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박쥐 유래 바이러스의 특성을 규명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박쥐 바이러스 연구에 쓰이는 생체모델은 일부 종의 단일 장기에 국한돼 한계가 있었다.
이에 IBS 연구진은 한국과 동북아, 유럽에 서식하는 식충성 박쥐 5종을 선정하고 기도·폐·신장·소장 등 장기를 본뜬 세계 최대 규모의 오가노이드를 제작해 코로나, 한타 등 박쥐 유래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와 면역 반응을 정밀 분석했다. 연구 결과 박쥐는 상황에 따라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반응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동일한 바이러스여도 박쥐의 종이나 감염된 장기에 따라 면역 반응이 다르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구진은 이를 바탕으로 효율적 바이러스 분석 플랫폼을 구축했다. 오가노이드는 원래 3차원 입체 구조다. 이러한 구조는 형태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자동화가 어렵고 분석 속도를 높이기도 쉽지 않다. 연구진은 오가노이드를 납작하게 펼쳐 균일한 세포층을 형성한 평면 구조로 만들어 자동화 실험과 고속 약물 스크리닝이 가능한 플랫폼으로 발전 시켰다.나아가 연구진은 야생 박쥐의 배설물로부터 신·변종 바이러스 2종을 성공적으로 분리 및 증식시켰다. 이는 세계 최초로 실험실에서 배양한 박쥐 오가노이드와 야생에서 얻은 바이러스 샘플을 결합해 실험한 사례로, 연구진은 이를 통해 바이러스의 발견, 분리, 유전체 분석, 감염 특성 분석 및 제어에 이르는 전주기 연구에 활용 가능한 오가노이드 기반 모델을 구축했다.
연구 결과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동물실험 의무를 폐지해 ‘오가노이드(유사장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고전적 동물실험의 한계를 넘어선 실험체계 구축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연구진은 이번에 구축한 오가노이드 모델을 표준화 하고 국내외 연구자들이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박쥐 오가노이드 바이오뱅크로 확장할 계획이다. 동시에 박쥐를 비롯해 설치류, 가축 등 다양한 동물 종의 오가노이드를 모은 ‘오가노이드 동물원’ 구축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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