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치제고(밸류업) 정책 도입으로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관심이 모이면서 지난해 국내 상장사의 시간외 대량거래(블록딜) 규모가 최근 들어 최대치인 8조원을 넘긴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이후 사전 공시 제도가 도입되고 밸류업 동력이 약해진데다 미국발 관세전쟁과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올해 들어 블록딜 거래량은 다시 주춤한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서울경제신문이 금융정보회사 딜로직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4년 연간 블록딜 거래금액은 8조 1572억 원(24건)으로 2023년 1조 8191억 원(8건) 보다 348%이상 급증했다. 8조 원이 넘는 거래규모는 투자시장에 유동성이 넘쳤던 2022년 거래량(6조 2624억 원·15건)을 뛰어넘는 숫자다.
그러나 올해 들어 4월말까지 블록딜 거래는 2조 1790억 원(6건)에 그쳐 지난해와 같은 호황은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올해는 특히 기업간 대형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거래도 멈추면서 대형 기관투자자의 투자금 회수 방안이 모두 막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되면 국내 기업에 대한 국내외 대형 투자가 줄어들어 기업 성장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게 투자업계의 우려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블록딜 거래가 사실상 역대 최대치를 찍은 주요 원인으로 밸류업 덕택에 지난해 증시가 상반기 상승세를 보인 점을 꼽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코스피지수는 2670포인트로 시작해 7월 11일 2891포인트로 최고점을 찍었다가 마지막 거래일에는 2399포인트로 머물렀다. 이에 따라 주요 대형 거래가 지난해 상반기에 집중됐다.
가장 큰 거래였던 삼성전자(005930) 등 삼성그룹 일가의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한 총 3조 1440억 원의 블록딜은 지난해 1월과 4월에 발생했다. 금융주 상승에 따른 기관 투자자들의 차익실현도 눈에 띄었다. BNB파리바와 사모펀드(PEF) 베어링 프라이빗에쿼티(PE)는 지난해 신한지주(055550) 지분 총 5.46%인 1도 3030억 원어치를 매도했다. 유통업계의 확실한 강자로 거듭난 쿠팡 역시 지난해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지분 0.83%에 해당하는 4930억 원의 블록딜을 감행하며 대형 거래에 이름을 올렸다.
그밖에 지난해 7월 사전공시제도가 도입되기 직전 거래가 집중됐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실제로 2024년 1월부터 6월까지는 월 2~4건 가량 블록딜이 이어졌지만 7월 이후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업계 관계자는 “사전공시제도 도입 직전 개인 최대주주를 중심으로 블록딜 거래가 반짝 늘었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서는 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로 인한 거래 등 같은 블록딜이어도 지난해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KDB산업은행이 과거 대우조선해양시절 보유했다가 한화오션(042660)으로 바뀐 지분 4.24%(1조 610억 원)를 지난달 28일 매도했고, SK텔레콤(017670)이 카카오(035720) 지분 2.44%(3950억 원)을 지난달 24일 팔아치웠다. 산은은 올해 내내 남아 있는 한화오션 지분을 팔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대형 M&A와 IPO가 올해 사실상 멈춘 상황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 블록딜에 대한 규제를 다듬어야 해외 대형 투자자를 유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업계 관계자는 “카카오 일부 임원진의 대량 주식 매도로 인해 도입한 사전공시제 때문에 다른 기업 최대주주들이 지분 매도를 주저하고 있다”면서 “해외 대형 PEF와 연기금 공제회가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에 점점 무관심해지면서 올해 대형 투자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기관투자자들은 밸류업에 대한 추가 대책이 나올 지도 관심을 갖고 있다.
한편 대형 블록딜 거래를 주관하는 투자은행 업계에도 희비가 엇갈렸다. 2024년부터 2025년 4월말까지 금액과 거래 기준 모두 UBS가 60% 이상 시장을 점유했고, 골드만삭스와 글로벌씨티마켓증권이 뒤를 이었다. 블록딜은 대형 기관투자자, 고객사와 신뢰를 기준으로 주관사를 선정하는데 짧은 기간 규격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수수료는 높지 않다. 다만 블록딜 거래 주관사에 발탁되지 못하면 앞으로 다른 거래에서도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최근에는 외국계 중견 IB 뿐만 아니라 대형 IB에서도 거래 수주에 집중하고 있다. 다만 외국계 증권사가 장악한 이 시장에서 국내 증권사는 여전히 전체의 27.5%(금액 기준)를 차지하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