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강행으로 훼손된 원자력 생태계가 윤석열 정부에서도 제대로 복원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원전에 대한 이념적 접근,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등으로 혁신 생태계 구축이 이뤄지지 못했다.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으로 세계적으로 원전 르네상스 붐이 일고 있으므로 6·3 대선 이후 정권 향배가 어떻게 되더라도 K원전 적극 지원 등 일관된 에너지 정책이 요구된다. 이기복 한국원자력학회장은 1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원전 수출이 가능한 나라는 한국을 비롯한 러시아·중국·프랑스·미국 등 소수에 불과하다”며 정권과 상관없이 일관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원전을 통해 기업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에너지 안보, 탄소 중립에서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이 회장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고수하면 국민 부담이 커지고 제조 업체들의 해외 이전이 늘어나 성장 동력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요국들은 AI 혁명에 따른 전력 수요 급증과 에너지 안보를 고려해 원전 육성에 총력전을 펴고 있는데.
△세계 각국이 원전에 다시 눈을 돌리고 소형모듈원전(SMR)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덴마크와 벨기에도 탈원전을 폐기하고 SMR을 도입하기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9년 영구 정지된 TMI 1호 원전을 2028년부터 재가동해 전기를 공급받기로 계약했다. 미국·캐나다·일본·프랑스·영국 등이 물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경수형 SMR, 소듐냉각로·고온가스냉각로·용융염원자로 등 비경수형 SMR을 망라해 80종 이상의 SMR을 개발 중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해양 부유식 SMR과 고온가스로를 각각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33년쯤 SMR 1기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가 벤치마킹하거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나라는.
△유럽 최대 전력 수출국인 프랑스의 경우 경제성, 에너지 안보, 온실가스 감축 등을 위해 총발전량 중 원자력발전 비중이 재생에너지(25%)의 2.5배가량인 62~70%에 달한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50기 이상의 원전을 건설했는데 2035년까지 신형 원전 6기를 추가 건설할 계획이다. 반면 독일은 탈원전으로 에너지 위기를 자초했다. 독일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을 계기로 2023년 원전 완전 정지를 추진하면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지나치게 높였다. 지난해 전력 소비의 55%를 태양광과 풍력 등으로 공급하면서 가정용과 산업용 전기요금이 한국보다 각각 3.3배, 2배나 높다. 원전 공백을 천연가스·석탄 발전으로 메우면서 온실가스 배출량도 프랑스의 10배에 달한다. 지난달 스페인·포르투갈 대정전의 원인 중 하나로 높은 재생에너지 비중으로 인한 전력망 불안정이 거론되고 있다.
-프랑스의 몽니로 최근 우리가 체코와 26조 원 규모로 체결하려는 두코바니 원전 2기 건설 본계약이 연기됐다.
△7일 본계약 서명식과 기업 협약식을 하기로 했었다. 현지에 도착했을 때 체코 지방법원이 한국수력원자력과 체코전력공사의 본계약 체결을 중단하라는 가처분 결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너무 놀랐다. 그러나 한국을 파트너로 삼겠다는 체코 정부의 방침이 확고하다. 체코 법원의 항소심 판결까지 수개월가량 본계약 체결이 지연될 것이지만 계약 자체가 무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공급망 변화로 원전 시장에서 우리의 글로벌 경쟁력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는 미국·캐나다와 SMR을 공동 개발·제작해 제3국에 수출할 수 있다. 핵연료 공급망을 공동 구축하고 사용후핵연료 처리 및 고속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할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 기준, 사이버 보안, SMR 국제 인증에서도 협력해야 한다. 미국·유럽연합(EU)과 함께 엔지니어를 양성하고 IAEA와 개발도상국에 대한 교육·훈련 공동 사업을 할 수 있다. 현재 러시아와 중국의 원전 인허가 규제 기준은 서방 세계와 많이 달라 원전 수출 강국인 러시아의 경우 예전 공산주의 국가 위주로 공략하고 있다. 1년에 10여 기씩 원전을 건설 중인 중국이 풍부한 인력과 엄청난 금융 지원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려 서방의 규제 기준을 맞춘다면 한국을 뛰어넘을 것이다.
-한국의 원전 수출 전략을 조언해달라.
△기술과 인력 등 원전 생태계 유지와 정책 일관성이 중요하다. 한수원과 대우건설이 5년여 전부터 체코 원전 수출을 위해 관계 구축에 나선 것처럼 미리 수출 지역에 공을 들여야 한다. 원전 수주 시 설계, 건설, 운영, 유지·보수, 인력 양성까지 패키지로 접근해야 한다. UAE에 원전 4기를 수출할 때도 제때 예산 범위 안에서 완공하고 방산, 군 교육까지 같이 해 효과를 봤다. 그 뒤 이집트·요르단·네덜란드·미국·중국 등에 연구로, 터빈·발전기 등을 수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전과 한수원으로 나뉜 원전 수출 체계 일원화, 범부처 차원의 산업·금융·방산·교육·문화 복합 지원, 현지화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의 원전 수출 유망국을 꼽는다면.
△우리 기업들이 많이 진출한 베트남에서 향후 3~4호기 원전을 도입할 텐데 미리 수출 기반 조성에 나서야 한다. 미국과 사우디 간 원자력협정 체결이 예상되는데 사우디 등 중동에 미국과 컨소시엄으로 진출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미국에는 대형 원전과 SMR 설치를 위한 공동 기획단을 추진했으면 한다. 다만 올 초 한수원과 미국 웨스팅하우스 간 지적재산권(IP)을 둘러싼 이면 계약으로 폴란드·불가리아 등에서는 우리가 단독으로 원전을 수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유럽에서는 영국 등을 제외하면 진출하기 힘들 수 있다. 웨스팅하우스가 원청, 한수원이 설계 하청·시공으로 역할을 분담한다면 불평등 지적도 나오지만 수출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
-한미 무역 협상에서 원자력을 협상의 지렛대로 쓸 수 있을 텐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2030년까지 최소 10기의 SMR을 건설하고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의 4배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미국은 IP, 전략물자 수출규제, 외교력에서 탁월하지만 대형 원전과 SMR 시공, 주기기 제작 능력에서는 부족하다. 미국 뉴스케일파워도 두산에너빌리티에 원자로 용기 제작을 의뢰했다. 조선·에너지·방산·반도체처럼 원전에서 ‘윈윈’할 수 있다.
-6·3 대선 1차 TV 토론회에서 후보들이 원전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민주당은 재생에너지에 무게를 두고 국민의힘은 원전을 지지하는 것처럼 국민에게 보이는 것 자체가 에너지 정책의 혼선을 불러올 수 있다. 정당은 저렴하고 깨끗한 에너지원 육성과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한 뒤 전문가들에게 경제성, 에너지 안보, 환경성, 안전성을 고려해 정책을 짜도록 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원전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온실가스를 감축하지 못하면서 국내 재생에너지 산업 도태, 한전 부채 급증 등을 초래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게 원전 정책을 조언한다면.
△이 후보는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에너지 믹스를 통해 기후위기 대응, 산업 경쟁력 강화, 지역균형발전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일단 탈원전 정책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실용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에너지 정책인지 우려된다. 그의 대선 캠프에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포진해 있다. 이 후보가 원전 사고를 우려하는데 우리 원전은 과거 대형 참사가 발생한 후쿠시마와 체르노빌 원전과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 매우 안전하다. 이 후보의 1호 공약인 ‘AI 산업 육성 및 디지털 전환’을 위해서도 원전이 필요하다. 이 후보는 2040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와 재생에너지 확대로 태양광과 해상풍력발전 수익을 지역 주민들에게 햇빛·바람 연금으로 지불하면서 지방 소멸에 대응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한전은 지난해 전기를 구매할 때 ㎾h당 재생에너지를 원전보다 3배나 비싼 약 180원에 구매해 적자가 약 200조 원까지 늘어났다. 재생에너지에만 무게를 두면 전력망 확충과 계통 접속 비용,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양수발전 구축·유지 비용 등이 많이 든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50% 이상인 독일과 덴마크의 전기요금이 유럽에서 가장 비싸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메우기 위해 LNG 발전을 늘리면 온실가스 배출 증가로 탄소 중립도 달성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재생에너지 확대를 꾀했으나 태양광·풍력 설비의 60~70%를 중국 등 외국산이 차지했다.
-K원전 르네상스를 위해 강조하고 싶은 말은.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책으로 원자력 생태계를 훼손하고 전력망 구축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도 원전 강화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 진전시킨 게 별로 없다. 탈원전주의자들이 반성도 없이 현재 원자력 유관기관에 잔류하면서 원자력 정책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탈원전 시기에 제정된 에너지 정책들이 에너지기본법 등을 근거로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학회 차원에서 원자력 정책 제안서를 만들었는데 차기 정부가 참고하면 좋겠다.
◆He is…
1962년 경기 포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근무하며 연구기획팀장·연구관리부장·정책연구부장·소통협력본부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정년연장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겸임교수, 한국과학기술지주 이사회 의장, 한국원자력학회 고급정책연구소장·수석부회장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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