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 정책을 두고 ‘잘못(wrong)’이라고 꼬집었다. 엔비디아 같은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성장의 발목만 잡았을 뿐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굴기(崛起)만 촉발했다는 것이다.
황 CEO는 21일(현지 시간) 대만 타이베이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엔비디아는 H20 제품의 중국 선적 금지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실제 엔비디아는 지난달 15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공시에서 중국용 H20의 재고, 구매 약정, 준비금 등과 관련해 최대 약 55억 달러(약 7조 6800억 원)의 비용이 2026 회계연도 1분기 실적에 반영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정부는 조 바이든 전임 대통령 시절부터 H100 등 엔비디아의 최첨단 AI용 반도체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달 엔비디아가 중국 반도체 수출규제를 피해 성능을 떨어뜨린 H20 칩 수출마저 제한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노선을 바꿔 AI 반도체 수출규제를 폐기했지만 과거 규제의 여파로 엔비디아를 비롯한 미국 업체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황 CEO는 “4년 전 95%에 달하던 중국 시장 점유율이 지금은 50%로 떨어졌고 사양이 낮은 제품만 팔면서 평균판매단가(ASP) 하락으로 수익도 많이 잃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수출제한이 미국 AI 기업에 막대한 손실을 안겼을 뿐 아니라 중국 기업의 기술 개발 의지만 북돋았다고 지적했다. 중국을 시장으로 인식할 때 미국에 더 유리하다는 해법 또한 제시했다. 황 CEO는 “중국은 전 세계 50%의 AI 연구자들이 몰려 있고 전 세계 AI 연구자들의 선물과도 같은 딥시크 모델도 우리 제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며 “내년 AI 시장 전체는 약 500억 달러 규모로 엔비디아 입장에서 (중국에서의) 엄청난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고 역설했다.
전 세계가 미국의 기술을 기반으로 AI를 구축하는 것이 미국의 패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미국 AI 기업이 넓은 시장을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할 수 있는 데다 AI 기술표준을 바탕으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황 CEO는 “(중국 시장을 통해) 미국은 세수도 늘리고 일자리도 만들고 산업도 유지할 수 있다”며 “미국이 ‘AI 확산’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지 않으면 경쟁자(중국)가 따라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 CEO는 AI 인프라에 대한 전 세계의 투자가 아직 초입 단계로 추론형 AI가 세계 각국과 기업의 컴퓨팅 인프라 수요를 폭증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지금까지 AI 모델은 한 번 질문에 한 번 답하는 원샷(One shot) 형태였지만 점차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검색하는 추론형 모델이 확산하고 있다”며 “이러한 추론형 AI는 컴퓨터 연산의 필요량을 1000배까지 증가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 CEO는 대만 신사옥 ‘별자리’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이틀 전 기조연설 당시 깜짝 공개 발표 때와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엔비디아가 대만과의 밀착을 강화하면 상대적으로 한국 AI·반도체 기업을 비롯해 미국·대만 외 기업들이 ‘엔비디아 생태계’로부터 소외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자 이를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