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통 만한 트로피를 받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다 선수들 가운데서 비로소 번쩍 들어 올리며 다같이 환호했다. 손흥민(33·토트넘)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 등 아시아 최초 기록을 숱하게 쌓아왔지만 이런 트로피 세리머니와는 지독하게 인연이 없었다. EPL 17위까지 추락한 이번 시즌에는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32강과 리그컵 4강에서 탈락해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만 남기고 있었다.
22일(한국 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에스타디오 산 마메스에서 열린 2024~2025 유로파 결승전. 경기 뒤 손흥민은 꿈꿔온 순간을 현실에 구현했다. UEFA 주관 대회 트로피 중 가장 무거운 것으로 알려진 15㎏짜리 트로피를 전달 받은 손흥민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동료들한테 다가가 일순간 번쩍 들었다. 색종이 세례 속에 환희의 함성이 이어졌다.
토트넘은 전반 42분 브레넌 존슨의 선제골을 잘 지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EPL 16위)를 1대0으로 이겼다. 발 부상에 7경기나 결장하고 최근 복귀한 손흥민은 후반 22분 교체 투입돼 20여 분을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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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데뷔 15년 만의 첫 우승이다. 2010년 독일 함부르크 소속으로 유럽 1군 무대에 데뷔한 손흥민은 2015년 토트넘 합류 후 2017년 EPL 2위, 2019년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2021년 리그컵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국가대표팀 소속으로는 201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지만 A매치가 아닌 연령별 대회였다. 토트넘이 2008년 리그컵 우승 이후 17년 만에 공식 대회에서 우승한 올해 손흥민도 비로소 무관 꼬리표를 떼고 ‘유관자’ 신분이 된 것이다. 토트넘의 유럽 클럽대항전 우승은 유로파 전신인 UEFA컵 1984년 우승 뒤 41년 만이다. 이번 우승으로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본선 티켓을 얻었다. 챔스는 유로파보다 한 등급 높은 대회다.
한국 선수의 유로파 우승은 1980·1988년 차범근(당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2008년 김동진·이호(러시아 제니트)에 이어 손흥민이 네 번째다. ‘울보’ 별명의 그는 마침내 기쁨의 눈물을 훔친 그는 현지 인터뷰에서 ‘이제 토트넘의 레전드가 된 것인가’라는 물음에 “맞다. 오늘만은 레전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7년 간 아무도 못 해낸 것을 해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한국인으로서 정말 자랑스럽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4시부터 가족처럼 응원해줘 감사하다”고도 했다.
손흥민은 “챔스에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덧붙였지만 다음 시즌 토트넘에 남을지는 알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적설이 다시 고개를 든 가운데 토트넘은 젊은 선수 위주로 리빌딩에 나설 계획이다. 안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잔류 여부도 손흥민 거취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손흥민은 이번 시즌 리그 7골 등 공식 경기 11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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