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줄기에 풍성한 초록 잎사귀를 매달고 있는 나무와 어떤 이야기를 품고 날아 들었을까 궁금해지는 작고 하얀 새들. 아름다운 색감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특유의 감성으로 그림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화가 이영지의 신작 개인전 ‘인 유어 사일런스’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13일까지 열린다. 2년 만의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35점의 신작은 낮보다 밤이 많다. 작가의 상징인 나무들은 여전하지만 짙푸른 밤하늘, 은은한 달빛과 어우러져 분위기가 한층 고요해졌다. 푸른 하늘과 초록빛 나무로 건넸던 위로도 신비로운 밤의 정취가 더해져 더욱 깊어졌다.
“밤하늘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보기도 그리기도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계속 밤을 피할 게 아니라 더 예쁘게 그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별사탕처럼 알록달록한 별빛을 하늘에 뿌려보면서 예쁘게 치장해봤어요.”
이번 신작들은 좀 더 ‘내려놓은 그림’이라고 했다. 작가는 “과거의 나는 요만큼의 비틀어짐도 허용하지 못했다”며 “번짐은 이래야 하고 구도는 어때야 한다는 완벽함에 집착했는데 이번에는 순간의 흐름과 공간을 느끼는 그대로 표현해보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든다”고 웃었다.
내려놓았다지만 작가 특유의 노동 집약적 작업 방식은 그대로다. 장지에 색을 올리고 말리고 또 올리고 말리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한 뒤 가는 붓으로 셀 수 없이 표면을 긋는 방식으로 오랜 한지의 맛을 낸다. 여기까지 밑 작업이고 그림은 이제부터다. 먹선으로 이파리 하나하나를 그린 뒤 색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잎이 무성한 나무를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새와 꽃, 나비 등을 그려 넣는다. 작가는 실제 시간이 참 많이 드는 작업이라며 “지금도 온전히 주 7일을 다 일하지 않으면 개인전을 열 만큼의 작품 수를 완성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100호 그림 작업 하나에 한 달을 꼬박 쏟아 붓는다.
이렇게 살아온 것이 벌써 20여 년. 오래 반복해온 고된 작업이 질린다거나 힘들 법도 한데 작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직도 그리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너무 즐거우며, 작품의 영감도 의외의 곳에서 쏟아진다고 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무척 재밌게 봐서 작품에 극중 애순과 관식이 산 ‘금은동호’를 그려넣은 뒤 ‘나 너무 좋아’라고 작품명을 붙였다. 극중 애순의 어머니가 초롱을 들고 밤길을 비추며 딸을 마중나가는 장면도 너무 마음에 들어 ‘항상 네게 닿아있는 내맘’이라는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컬렉터 등 팬과의 소통도 그림이 된다. 작가는 “꽃바구니를 물고 오는 새가 멀리 있는 아들처럼 보였다거나 옹기종기 모여있는 새가 우리 가족 같다는 등 생각지도 못한 감상을 많이 듣는다”며 “뭉클해지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음에는 이 이야기도 그려봐야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소통이 “좀 더 진정성 있게 그려야지” 결심하는 계기도 됐다.
“내게는 많은 작품 중 하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단 한 점의 그림인 거잖아요. 그걸 깨달은 순간 그림 한 점 한 점에 더욱 혼을 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는 앞으로도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그려갈 생각이라고 했다. 애초에 나무를 그리게 된 계기도 “무심코 이파리 하나를 그렸는데 어느새 한 그루의 나무가 됐다. 그 모습이 한때 보잘것 없었지만 어느새 성장한 나 자신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시간과 함께 작품 분위기나 소재가 조금씩 변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뭘 계획하거나 의도한 적은 없었다”며 “앞으로도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히 계속 그려나가겠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