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민간부채가 향후 경제성장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부채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가계와 기업의 부채가 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아 체질 개선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변동성에 취약한 ‘약골 경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부동산에 집중된 부채 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잠재성장률이 0%대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13일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0.3%다. 조사 대상 38개국 중 캐나다(100.4%)에 이어 2위다. 2021년 3분기 99.3%로 정점을 찍고 내림세를 보이고 있지만 주요 선진국인 미국(68%), 일본(61.8%), 영국(76%)은 물론 중국(61.1%) 대비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다.
가계와 기업 부채를 합한 민간부채는 2020년 처음으로 GDP의 2배를 넘어선 뒤 줄곧 비슷한 수준(2024년 3분기 기준 201.9%)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거품 붕괴가 본격화한 1992년(208%)의 턱밑 수준까지 차고 올라왔다.
부채가 많으면 경제를 짓누르는 요소로 작용한다. 지나친 가계빚은 소비 여력을 줄여 내수 부진을 촉발해 경기 침체를 부르기 쉽다. 성장률이 떨어지면 임금과 소득이 낮아지고 부채가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진다. 또 기업들이 부채 상환에 집중하면 투자·고용·연구개발(R&D) 지출이 줄어들어 장기적으로 성장 동력이 감소하게 된다.
더욱이 금리 상승기에는 이자비용이 급증해 가계의 소비심리가 더 크게 위축되고 이자조차도 못 갚는 한계기업이 늘어나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일본도 1980년대 저금리 시기에 가계·기업들이 앞다퉈 빚을 내 투자했다가 1990년 기준금리가 6% 수준까지 오르자 직격탄을 맞고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긴 침체로 빠져들었다. 부채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도 금리 상승이라는 변수를 만날 경우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남진 원광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특히 우리나라는 변동금리대출 비중이 높아 장기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즉각 늘어난다”며 “이는 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운신의 폭도 좁아진다. 최근처럼 전 세계적으로 구조적인 저성장 국면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선제적인 금리 인하 카드를 써야 하는데 부채 리스크에 발목이 잡힐 경우 적기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반대로 물가 등이 빠르게 올라 기준금리를 올리고 싶어도 이자 부담 급증과 대출 부실 우려에 머뭇거리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 민간부채는 부동산에 너무 쏠려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부동산 부문에 투입된 신용 잔액은 1932조 5000억 원으로 전체 민간부채의 49.7%를 차지한다. 부동산 신용 잔액은 2014년 이후 연간 100조 원 이상 증가해 10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늘었다.
부동산은 다른 산업 대비 생산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받는데 대출이 집중되면 중장기 성장 동력이 떨어지고 만약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하락할 경우 담보 가치가 하락해 금융권도 연쇄 타격을 입게 된다.
실제로 국내외 기관은 부동산에 집중된 부채 등을 우려해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지속적으로 낮추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의 노동·자본·자원 등 모든 생산요소를 동원하면서도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을 의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우리나라 잠재성장률 추정치를 1.98%로 제시했다. 2017~2026년 10년간 한국의 잠재성장률 낙폭은 1.02%포인트(3.00%→1.98%)로 잠재성장률이 공개된 37개국 중 일곱 번째로 하락 폭이 크다.
전문가들은 급증한 부채의 연착륙을 유도하면서 부동산에 과도하게 집중된 대출을 생산성이 높은 기업으로 분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부채 증가세가 이어지면 가계와 기업의 지출 감소로 내수 및 투자 부진을 촉발해 성장률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대출 수요를 관리하면서 생산적인 분야로 신용이 배분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 최고 수준인 민간부채에 더해 정부부채도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부채는 주요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사실이지만 증가 속도가 빨라 안심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당장 재정 건전성에 부담을 안기는 장기물 국고채 금리가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올 들어 미국과 일본에서 나타났던 장기물 금리 인상 랠리가 우리나라에서도 재연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실제 12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국고채 10년물과 3년물 간 금리 격차(스프레드)는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4일 기준 0.479%포인트로 벌어져 2022년 3월 21일(0.473%포인트) 이후 약 3년 만에 가장 큰 격차를 나타냈다.
10년물 국채금리가 오르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최근 인상은 재정적자 확대와 이에 따른 국채 발행 증가에 대한 우려가 반영돼 있다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최근 정부는 20조 원 이상의 대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공식화하면서 적자 국채 발행을 예고한 상태다. 여기에 올해 경제성장률이 0%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까지 겹치면서 시장에서는 한국의 중장기 성장성에 대한 우려가 장기금리에 반영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장기금리 상승이 정부의 재정 건전성에도 직접적인 압박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높은 국채금리는 정부의 차입 비용을 끌어올려 이자 지출을 늘리는 만큼 중장기적으로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한국의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54.5%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비(非)기축통화국 평균(54.3%)을 처음으로 넘어서는 수준이다. 비기축통화국은 주요 기축통화국보다 부채비율을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지국의 통화 발행을 통한 재정 대응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채무 증가 시 금융시장 불안이 더 쉽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축통화국은 유사시에 자국 돈을 발행해 국가 빚을 갚을 수 있다.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 장기금리 상승은 단순한 시장 반응이 아니라 우리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며 “재정 확장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 시장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는 고령화에 따라 향후 GDP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분모가 줄어드는 구조에서 부채가 늘면 지속 가능성이 더욱 나빠진다”며 “단순히 현금성 지원을 반복하는 접근은 인플레이션 자극과 금리 상승을 불러와 정책 효과를 갉아먹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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