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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도 같이 만들었는데…'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앙숙으로

■ 뿌리깊은 이란-이스라엘 그림자 전쟁

사이 좋던 두 나라, 호메이니 혁명 이후 갈라져

2000년대 들어선 핵 프로그램 갈등 요소 대두

6월 3일 아야톨리 호메이니 사망 36주기를 맞아 이란 테헤란 대형 빌보드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EPA연합뉴스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규모 공습을 개시하면서 전면전 수순으로 접어드는 양상이다. 양국은 한때 경제협력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뭉쳤던 이웃 국가였다. 두 나라가 지금처럼 앙숙이 된 배경에는 중동 지역 역학 구도를 놓고 치열한 힘겨루기가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과거 이란은 당초 다른 아랍 국가들과 같이 영국의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1947년)과 유엔 가입(1949년)을 반대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반대하며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인들이 더 많은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란은 이스라엘 건국(1948년) 2년 뒤에는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주요 이슬람 국가 가운데서는 튀르키예에 이어 두 번째 승인이다. 이후 양국은 대표부를 두고 텔아비브와 테헤란을 잇는 직항편을 운항하는 등 긴밀히 협력했다. 유럽으로 수출하는 이란산 석유를 운송하는 양국 합작회사를 운영하고 ‘플라워’라는 이름의 탄도미사일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발발한 후 양국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왕정이 무너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정권을 쥐면서 이란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불법 국가로 규정하고 ‘이슬람의 적’ ‘위대한 사탄(미국)에 기생하는 작은 사탄’이라고 비난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갈등을 더욱 키웠다. 2005년 우라늄 농축을 재개한 이란은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며 공세를 강화했다. 이스라엘도 이란의 핵 과학자들을 잇따라 암살하고 2010년에는 이란 우라늄 농축시설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을 단행했다.

2009년 이스라엘에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2기 정권이 출범하면서 ‘강대강’ 대치는 심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18년 이란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을 당시 국제사회의 우려 속에서도 네타냐후 정권은 환영하고 나섰다. 이란 역시 미국이 주도한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 간 관계 정상화를 방해하는 등 이스라엘 고립 전략을 계속 구사했다. 이란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2023년 10월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기습 공격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스라엘 카츠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이번 이란 핵 시설 공습 시작 전 이스라엘 방위군 참모 포럼에서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는 가자지구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등 이란의 대리 세력들을 상대해 왔다”며 “이란 핵 프로그램 저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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