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부산시와 부산노동권익센터가 연 노동공제회 정책 토론회. 박재철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센터장의 사례 발표를 기다린 참석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그동안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이 센터의 활동을 주목해왔다. 부산 행정에 반영할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토론회를 신청했다는 한 참석자는 “현장 참석자들의 질문이 박 센터장에게 집중됐고 (활동 성과가) 부럽다는 반응도 있었다”며 “센터는 여러 지역에 있는 노동자지원센터 중 가장 활동을 잘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노동권 사각지대가 많다고 평가 받던 안산시가 달라지고 있다.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중심이 된 적극적인 노동권 보호 활동이 노동 현장을 바꾸고 있다는 평가다. 안산시는 노동법을 적용받지 못하거나 노동조합 밖 근로자를 지역공동체가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20일 박 소장에 따르면 안산시는 여느 지역 보다 노동권 보호가 시급한 지역이다. 근로자 10명 중 4명꼴로 제조업체에서 일하는데, 이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근로자 5인 미만 사업장에 몰려있다. 근로자 월 평균 임금은 약 280만 원으로 전국 평균 보다 약 20만 원 낮다. 제조업 근로자 약 12%는 이주노동자인데다 파견 근로자와 산업재해 발생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다. 하지만 노동조합 조직률은 약 2%로 전국 평균치(13%)에 크게 못 미친다. 안산시는 노조를 통한 근로자 권익 보호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런 안산을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센터가 바꾸려고 노력한 지 13년째다. 2012년 설립된 이 곳은 노동상담, 권리찾기 운동, 정책 연구, 교육, 생활지원, 소규모 사업장 지원 등 크게 6가지 활동을 벌인다. 모든 사업에 시민들이 연대체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게 특징이다. 자연스럽게 센터는 지역공동체의 구심적 역할을 한다. 센터의 ‘13년 열정’은 6가지 사업 모두 안정적인 운용의 밑거름이 됐다. 정책연구만 하더라도 2013년부터 매년 임금, 근로시간, 비정규직 비율 등을 분석해왔다. 안산시 노동 현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특히 ‘노동권익 서포터즈’는 편의점, 프랜차이즈 업체 등을 직접 방문해 시민이 현장 노동권을 지키는 활동이다. 노동권을 보호받기 어려운 청년이 주로 일하는 일터를 찾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지원 사업이다. 작년에는 245곳이 이 서포터즈로부터 인증을 받아 ‘노동권 안심사업장’이 됐다. 센터가 2015년 ‘힘내란 알바’란 이름으로 시작한 이 서포터즈는 경기도가 2020년부터 도 전역으로 확대했다.
아파트 경비·청소근로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이들과 입주자, 관리사무소, 관리용역업체, 안산시의 ‘논의협력기구’를 만든 것도 센터의 대표 성과다. 이 기구는 아파트 경비원 고용 비용을 아끼기 위해 1년 미만이나 개월 단위 계약 관행에 선을 그었다. 전국적으로 만연한 경비원 쪼개기 계약은 경비원 고용 불안을 키우고 불법 소지도 크다. 하지만 여러 지역은 입주민과 관리사무소 이해관계로 인해 갈등을 벌이는 등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박 센터장은 “지속적인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20%대던 최저임금 위반율이 5% 아래로 내려갔다”며 “경비원 노동자의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 관행도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2015년 설립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공제회'(좋은 이웃)도 부산시가 토론회 주제로 삼을만큼 안착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곳은 센터와 안산시민이 스스로 만든 사회안전망이다. 680여 가구를 회원으로 뒀고 자산도 약 1억7000만 원 규모로 늘었다. 센터처럼 경비·청소노동자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요양보호사 등 업무 환경이 열악한 이들에게 산재 시 지원, 소액 대출 업무를 한다. 이들은 공제회원과 공제회원 밖 근로자를 ‘이웃노동자’로 부르면서 서로 돕는다.
안산시의 센터와 노동공제회는 노동법 미적용과 낮은 노조 조직률이 만든 노동권 사각지대를 지역공동체가 어떻게 풀 수 있을지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노동계와 학계는 시각지대를 줄이는데 산별노조가 유효하다고 요구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북유럽처럼 산별노조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스웨덴의 경우 노조조직률은 65%, 단체협약 적용률은 88%에 이른다. 우리도 산별교섭이 이뤄지려면 그만큼 많은 근로자와 업종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도록 조직화돼야 한다. 노동계는 그동안 비정규직·청년·여성 등 다양한 계층을 노조 안으로 껴안으려고 했지만, 큰 성과를 못 냈다. 경영계는 산별노조에 대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규모·업무·능력 차이를 어떻게 단일 임금 체계로 만들어 교섭할지 회의적이다. 이재명 정부는 지역·산별교섭 활성화 정책을 예고했다.
박재철 센터장은 한국비정규직노동운동단체네트워크 공동의장을 비롯해 약 10곳의 노동시민단체와 유관기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런 행보의 배경에는 다른 지역도 안산시처럼 민간의 노동권 보호 활동을 확산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박 센터장은 “지방정부의 조례에 따른 지방 정부 예산으로만 운영하는 구조의 센터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며 “중앙 정부의 지원이 제도화돼서 전국 노동자가 고루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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