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가 무역 협상을 통해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협력펀드를 조성하기로 하면서 한국의 조선업은 ‘제2의 황금기’를 맞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자력발전 관련 산업도 생태계가 무너진 미국 측에서 한국에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수혜를 볼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일본, 유럽연합(EU) 등 경쟁국에 비해 2.5% 관세 이점을 누렸던 자동차는 15%로 관세가 같아지면서 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됐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현지 시간)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협력펀드는 조선업 전반에 대해 우리 기업들의 수요에 기반해 사실상의 우리 사업으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루스소셜에 “미국이 소유하고 통제하며 내가 대통령으로서 선정한 투자에 한국이 3500억 달러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 중 1500억 달러의 조선협력펀드는 우리 측이 주도해 집행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구 경제부총리는 “합의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는 미국 내 신규 조선소 건설, 인력 양성, 공급망 재구축, 선박 건조, 유지·보수·정비(MRO) 등을 포괄한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 설계 건조 능력을 가진 우리 조선 기업들이 미국 조선업의 부흥을 도우면서 기회와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회담에서 한국 조선업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조선업 투자를 빨리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원전도 기대되는 분야다. 한미가 합의한 2000억 달러의 대미투자펀드는 여러 전략 산업 분야 중 원전에도 투자하기로 했다. 원전 업계에서는 미국의 원전 건설 및 산업 재건을 도울 수 있는 나라가 사실상 한국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대미투자펀드 운영 과정에서 우리 기업의 크고 작은 지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될 것”이라며 “미국 내 원자력발전 관련 수요가 많은 상황에서 미국 원전을 짓는 등의 방식으로 우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자동차 및 부품의 경우 치열한 경쟁 구도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로 한국산 자동차 및 부품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까지 무관세로 수출됐다. 반면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일본과 독일 등 EU산 차량은 2.5%의 관세를 내 한국이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EU 모두 똑같이 15% 관세를 적용 받으면서 관세 메리트가 사라졌고 원가 절감 등 경쟁력 강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브리핑에서 “한국은 마지막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주장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했다”며 “일본이 기존 2.5% 관세에서 12.5%포인트 올린 15%로 합의한 점을 고려하면 FTA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현대차증권은 이날 보고서에서 “미국 신공장 가동을 고려하지 않으면 현대차와 기아차는 50만 대씩의 관세에 노출돼 관세 부과 1%당 각각 연간 1500억 원의 이익이 줄어들 것”이라고 추정했다.
철강과 알루미늄 역시 무거운 숙제를 떠안게 됐다. 이미 50%의 관세율로 국내 철강 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미국 측이 한국에 쿼터제 등을 적용해줄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없기 때문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이날 X(옛 트위터)에 “철강·알루미늄·구리 관세의 경우 합의에 포함되지 않았고 여전히 변동이 없다”고 적었다. 반면 EU 측은 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평가다. 백악관은 팩트시트에서 철강·알루미늄·구리에 대한 관세가 변경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EU는 29일 자료를 통해 “전통적 교역 수준에서 유럽산 수출품에 저율관세할당(TRQ)을 도입해 현재의 50% 관세가 인하될 것”이라고 적시했다. 미국 정부가 냉장고·세탁기·건조기 등 가전제품에도 철강 함유량에 따라 50%의 관세를 부과하는 가운데 이들 관세가 낮아지지 못하면서 한국 가전 업체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평가다.
반도체는 다른 나라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미국 측이 약속한 만큼 향후 품목관세가 부과되더라도 한숨은 돌리게 됐다. 하지만 전체 수출액의 8% 정도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15%의 관세가 부과될 경우 메모리반도체 제품을 중심으로 15% 내외의 가격 인하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 수출 비중이 약 18~20%인 의약품은 최혜국 대우를 약속받았고 이미 품목 관세에 대비해 연초부터 미국 수출을 확대, 2년 이상의 재고를 비축했다는 점에서 부정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농산물의 경우 일단 쌀과 소고기 시장은 지켰지만 사과, 블루베리, 유전자변형작물(LMO) 감자 등은 수입 길이 열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구 부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과채류에 대한 한국 검역 절차에 대해 물어보며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며 “비관세장벽과 관련해 앞으로 검역 절차 개선 등 기술적 사안에 대해 협의를 이뤄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현재 검역 절차가 진행 중인 이들 품목이 경우에 따라 한국에 수입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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