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과 중국을 떠올리면 안경을 고쳐 쓰고 보게 된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미국은 편파적 보호무역을 중심에 놓고 있고 중국은 이런 미국을 보면서 자유무역을 부르짖고 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기술은 있어도 공장은 없는 미국, 공장은 있어도 기술이 부족한 중국이 패권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 훼손을 감수하는 상황까지 왔다.
집 나간 제조업을 다시 들이기 위해 무리수를 남발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제 민간기업 국유화에 나섰다. 핀치로 몰린 ‘칩질라’ 인텔, 미국 유일의 희토류 채굴 회사 MP머티리얼스에 이어 방산 업체 록히드마틴에 대한 지분 투자 얘기가 나오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미국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승인하면서 정부가 황금주를 갖도록 했다. 이런 에피소드는 스트롱맨 트럼프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흡사 중국 현대화를 위해 흑묘백묘론을 앞세웠던 덩샤오핑처럼 트럼프는 미국의 제조업 기지화를 위해 ‘트럼프식 국가자본주의’를 아무렇지 않게 밀어붙이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만만찮다. 데이터가 돈이 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중국은 거대한 실험실로 변모했다. 트럼프 제재에 맞서 기술 굴기가 급한 중국 정부는 ‘쩐주’ 역할만 맡고 규제는 모두 걷어내고 있다. 중국은 보안, 데이터 오남용, 안전 등 온갖 부작용은 일단 뒤로 미룬 채 기술 개발과 상용화에 매진한 결과 신산업에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딥시크는 엔비디아 칩에 대한 금수 조치에 알고리즘 혁신으로 대응해 가성비 최고의 인공지능(AI) 모델(R1)를 내놓았다. 또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의 성장세는 미국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외국의 스마트폰·자동차 기술을 거리낌 없이 베끼던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이제 우리 내부로 눈을 돌려보자. 생산 내재화에 열을 올리는 미국, 규제 해방구에서 신산업 육성에 나선 중국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게 우리 숙명이지만 현실은 갑갑하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도 숨이 막힌다. 미국에 투자해야 할 돈만 총 5000억 달러(3500억 달러 투자펀드+1500억 달러 기업 직접 투자), 약 700조 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인구를 5100만 명으로 잡으면 1인당 약 1370만 원꼴이다. 이재명 정부는 국민 한 사람당 15만 원을 뿌린 민생회복 소비쿠폰도 돈이 없어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고 읍소했다. 그런데 그 돈의 91배를 미국에 쏟아 부어야 한다. 투자펀드의 성격을 놓고 ‘대출·보증 중심(한국)’ ‘직접 투자가 뼈대(미국)’라는 주장이 엇갈리지만 어찌 됐든 상당 금액을 기업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국내에서 돈이 씨가 마를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이런 맥락을 감안하면 일본, 유럽연합(EU) 대비 협상을 잘했다고 자위할 때는 절대 아니다. 이대로면 국내 일자리가 사라지고 제조업 공동화는 시간문제다. 일각에서는 한미 정상 간에 공동성명이나 합의문이 없다고 타박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타임라인을 박지 않은 게 되레 다행이다. 내년에 중간선거가 있는 트럼프도 시간이 제일 무서울 것이다. 선거에서 지면 트럼프는 곧바로 레임덕이다. 달리 보면 그만큼 트럼프가 우리를 압박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엄중한 국면이다.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예전부터 중국은 기술 추격이 끝나면 그 분야의 다른 제조 강국을 고사시키는 전술을 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유력한 타깃은 한국이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가 중국 시장에서 그런 식으로 쪼그라들었다. 더 무서운 점은 중국이 신산업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본토를 넘어 자유주의국가에 직접 들어가 세를 확장하고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장을 눈에 띄게 늘리고 있는 샤오미, 비야디(BYD) 같은 기업들을 보면 잘 드러난다.
우리에게서 기업과 돈을 빼가는 미국, 우리 기업을 말려 죽이는 중국 앞에서 본질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 수난의 시대, 이재명 정부의 정책 해법은 무엇인가. ‘노동’으로 급격히 쏠려 큰 그림을 놓쳐서는 안 된다. 좌클릭이든 우클릭이든 우선 기업이 생존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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