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역사 바닥에는 옅은 회색의 타일들과 다른 짙은 회색 타일 두 장이 박혀 있다. 각각 마름모와 삼각형 모양의 두 타일 사이 거리는 고작 열 걸음 정도. 타일이 박힌 자리는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국권 침탈의 원흉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와 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서 있었던 곳이다. ‘열 발자국 앞까지’ 닿기 위해 안중근 의사는 얼마나 길고 고단한 여행을 했을까.
광복 80주년을 맞아 올해 10월 22일부터 27일까지 한국기자협회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경로를 답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안중근 의사의 발걸음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중국 하얼빈으로 향했다면 이번에는 하얼빈에서 시작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되짚어가는 여정이었다.
답사의 출발점은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결연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그의 유묵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가 남긴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돼 있는 기념관 맨 안쪽에는 통유리가 설치돼 하얼빈 역사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그 플랫폼이다. 아담한 기념관이지만 116년 전의 바로 그 순간을 목격하는 듯한 전율을 준다.
기념관 외에도 하얼빈 곳곳에는 항일운동의 숨결이 살아 숨 쉰다. 하얼빈 중심가에 위치한 자오린공원(옛 하얼빈공원)에는 ‘청초당(靑草塘)’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풀이 파릇하게 돋은 언덕’이라는 뜻의 청초당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서거하기 이틀 전 독립을 기원하며 남긴 마지막 유묵이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공원에 묻었다가 조국의 국권이 회복되면 고향으로 옮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일제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은폐한 탓에 안타깝게도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하얼빈역에서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국경을 넘으면 러시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거주한 고택이 있는 우수리스크에 다다른다. 함경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된 그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시작부터 끝까지 지원한 최재형 선생은 고려인 300여 명이 학살당한 이른바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의 총에 유명을 달리했다. 동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성품에 한인들은 그를 러시아어로 벽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라고 불렀다고 한다.
최재형 고택과 차로 10분 거리에 또 다른 애국지사의 자취가 남아 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전 세계에 알린 애국지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다. 1917년 48세의 일기로 병사한 그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음을 탄식하며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무덤조차 없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광복회와 고려학술재단이 2001년 그의 유해를 뿌린 라즈돌나야강 인근에 유허비를 건립했다.
여정의 마지막은 러시아 극동의 중심지이자 고려인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가 깃든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아르바트 거리 한복판에는 최재형 선생이 소유했던 저택이 지금도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해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최초의 일간신문인 해조신문과 안중근 의사의 글이 실리기도 했던 대동공보사 터가 있는 곳이다. 개척리와 신한촌 등 고려인 역사와 관련한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뜻깊다.
이곳에서 약 3시간 30분을 달리면 북중러 국경 지역인 크라스키노에 도착한다. 먼지만 날리는 외진 이 동네에서 안중근 의사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왼쪽 네 번째 손가락 첫 마디를 잘라 국권 회복 의지를 다졌다. 이를 기념해 광복회가 2001년 ‘단지(斷指)동맹비’를 세웠다가 2006년 강이 범람하자 지금의 자리에 기념비를 추가로 세웠다.
단지동맹비로 향하는 길에는 크라스키노 전망대가 있다. 야트막한 전망대에 오르면 황량하다 못해 쓸쓸한 벌판이 눈에 들어온다. 크라스키노에서 두만강까지 거리는 단 60㎞. 광화문에서 인천공항까지 거리와 비슷하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낯선 땅을 헤매던 젊은 그들도 이 언덕에 올라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약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뜨거워진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sepys@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