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옥스퍼드 대학의 동물학자 리차드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The Selfish Gene)>를 출판한 이래, 유전자들이 무자비하게 자기만을 위한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어 왔다. 이후 과학자들은 유전자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유전자를 방해하는 사례들을 많이 발견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 바브라햄 연구소의 발달생물학자 미구엘 콘스탄시아가 이끄는 연구팀은 ‘이기적인 유전자 이론’에 또 다른 불을 지폈다.
콘스탄시아는 태반의 영양보급을 지배하는 남녀 유전자들이 서로 다툰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쥐의 수컷에서 ‘유사 인슐린 성장요인(Igf2)’라고 불리는 유전자 일부를 제거했다. 그 다음 그 쥐의 정자를 난자 수정에 사용했다. 그 결과 아버지의 Igf2 유전자가 없이 태어난 새끼쥐는 보통쥐에 비해 훨씬 마르고 허약했다.
대부분의 유전자에는 하나는 엄마에게서 다른 하나는 아빠에게서 온 두 가지의 복제유전자가 활동한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둘 중의 하나만이 단백질을 생산한다. Igf2의 경우에는 모계유전자가 활동을 못한다. 즉, 오로지 부계 유전자만이 단백질을 만들어 태반을 통해 엄마의 몸에서 아기의 몸으로 영양분이 들어오게 한다.
과학자들은 한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를 제압하는 이 현상을 ‘유전각인(刻印)’이라고 부른다. 이 특징은 모든 포유류에 공통적이어서,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유전각인이 발달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콘스탄시아와 다른 많은 학자들이 믿는 바로는, 그것은 남녀 유전자의 상호 경쟁 때문이다.
태반 없이 발생하는 동물들은(달걀 속의 병아리처럼) 태아가 섭취할 수 있는 영양분의 양이 미리 정해져 있다. 그러나 포유류의 태아는 어머니에게서 영양을 공급받는다. 따라서 엄마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작은 태아를 원한다. 하지만 아빠의 유전자는 탐욕스러워서 무조건 크고 건강한 아기를 갖고 싶어한다. 엄마의 건강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서 성장상의 충돌이 발생한다. 궁극적인 해결방안으로 아기는 중간 크기로 결정된다. 그래서 콘스탄시아가 부계 유전자를 제거하자 눌려있던 모계 유전자가 지배하여 작은 새끼가 태어난 것이다.
콘스탄시아는 보통보다 작게 태어나는 인간 아기들도 유전각인 현상의 결과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더 윌리 신드롬(병적인 비만과 정신손상 및 다른 비정상적 특질을 유발)과 같은 다른 병들도 부계 유전자가 결핍되었을 때 발생한다는 것이 이미 밝혀져 있다. 물론 아기가 비정상적으로 작게 태어나는 데에는 다른 수많은 요인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콘스탄시아와 그의 동료들은 미숙아들의 태반을 검사해 부계 Igf2 유전자가 비정상인지를 조사할 계획이다. 만약 콘스탄시아의 가정이 옳다면, 앞으로 그러한 비정상적 특질들은 쉽게 진단할 수 있고 치료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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