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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戰史] 머나먼 다리... 마켓 가든 작전

1944년 9월 17일. 미영 연합군은 ‘마켓 가든’이라는 암호명으로 당시 독일령이던 네덜란드에 공수부대원 3만5,000명을 강하,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을 감행한다.

독일의 운명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2차 대전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켓 가든 작전은 작전개시 8일 후 연합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만다.

이번 호에서는 영화 ‘머나먼 다리’로 각색돼 더욱 유명해진 마켓 가든 작전의 실체에 대해 알아본다.

서른이 넘은 독자라면 지난 1980년대 현충일이나 공휴일, 명절에 방송사가 단골로 틀어주던 2차대전 영화 ‘머나먼 다리’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던 어린 나이의 필자에게 ‘좋은 편’인 미영 연합군이 ‘나쁜 편’인 독일군에게 도륙 당하던 영화 내용은 무척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전까지 독일군의 승리를 묘사한 영화는 보지도 못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 후 나이를 더 먹은 후에야 이 영화가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이었던 마켓 가든(Market Garden) 작전을 묘사한 역사가 코넬리어스 라이언의 저서 ‘A Bridge Too Far’를 극화한 것임을 알게 됐다.

마켓 가든 작전은 왜 기획되었으며, 당시 모든 면에서 독일군을 압도하고 있던 연합군은 이 작전에서 왜 그토록 처참한 패배를 겪었을까?

마켓 가든 작전의 배경

노르망디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 주둔 독일군을 거의 괴멸시킨 연합군은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었다.

독일군은 8월 말이 되자 프랑스와 유럽 저지대 국가에서 일제히 빠져나갔고,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이끄는 미 육군의 제12군이 전쟁 이전의 독일 국경에 근접할 정도로 전세는 연합군에게 기울었다. 이에 따라 1944년이 지나기 전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도 있을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 같은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 이면에는 프랑스 주둔 독일군을 말끔히 정리하지 못한 부실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부대의 신속한 진격을 위해 매우 중요한 보급 문제를 보면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실제 1944년 8월 시점에 연합군이 사용할 수 있는 프랑스 항구는 셀부르, 셀트 등 몇 군 데 뿐이었다.

게다가 항구에 하역된 물자를 지나치게 멀리 앞서간 부대까지 실어 나를 방법도 당시로서는 마땅찮았다. 미군의 전방 부대들은 후방 수송부대가 따라오지 못하는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군도 본토 방위를 위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독일 본토에 발을 들여 놓으려면 ‘지그프리트 라인’을 돌파해야 했다.

지그프리트 라인은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상정, 건설해 놓았던 본토 방위선이다. 이는 연합군과 독일군의 한 판 결전을 의미하며, 상당한 인명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겹쳐 9월에 들어서자 질풍노도 같던 연합군의 진격은 정체되고 만다. 이에 따라 보다 경제적인 작전운용 차원에서 지그프리트 라인을 우회, 독일 본토에 발을 들여놓는 작전이 추구됐다.(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연합군이 승리에 도취해 마켓 가든 작전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 같은 배경 아래에서 탄생한 것이 오늘날까지도 연합군 최대 실패작전 중 하나로 꼽히는 마켓 가든(Market Garden: 마켓 가든은 과거 유럽에서 자급자족 및 상업적 목적으로 이뤄지던 각 가정의 텃밭 농사를 말한다. 이 작전에서 마켓은 공수부대, 가든은 기갑부대를 의미한다) 작전이었다.

실 하나로 일곱 바늘 꿰기

마켓 가든 작전의 개요를 설명하면 대강 이렇다. 제1연합공수군 예하 부대 중 미 제101공수사단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 팀을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연고지)을 점령하고, 미 제82공수사단은 네덜란드 네이메헨을 점령하는 것이다.

또한 영국 제1공수사단과 폴란드 제1공수여단(폴란드가 독일에 점령될 때 영국으로 탈출한 폴란드인들로 구성된 부대)은 가장 깊숙이 있는 아른헴(당시 독일군 전선 후방 100km 거리)을 점령하고, 세 도시를 관통하는 69번 고속도로와 그 위에 걸린 교량 7개를 확보한 후 이틀을 지켜내는 것이다.

만약 이틀을 지켜내면 영국군 제30군단의 기갑부대가 이 도로와 교량을 통해 라인 강의 네덜란드 지역인 네더라인 강을 건너 순식간에 독일 본토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작전이었지만 이미 계획 때부터 위험요소가 노출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영국군과 폴란드군이 가서 싸워야 하는 아른헴에서 독일군의 전차(충분한 대전차 화기를 휴대할 수 없는 공수부대에게는 엄청난 천적임)가 목격됐다는 정보 보고가 속속 날아들기 시작했다.

또한 기갑부대가 전진할 69번 고속도로 역시 대규모 부대가 진격하기에는 폭이 너무 좁았다. 게다가 지형상의 문제로 영국군과 폴란드군 공수부대는 점령해야 할 아른헴 대교에서 15km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낙하해야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력 투입으로 손쉽게 독일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유혹에 사로잡힌 연합군 사령부는 이러한 징후들을 무시하고 작전 실행에 반대했던 장교들을 모조리 축출해 버린다.

결국 1주일간의 준비를 거쳐 1944년 9월 17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원됐던 것의 두 배가 넘는 4,000여대의 수송기와 글라이더가 3만5,000여 명의 미영 공수부대원들을 태운 채 영국을 출발, 네덜란드로 향한다.

비행기의 날개 끝에서 끝으로 점프만 해도 네덜란드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 만큼 엄청난 항공기의 대군은 각종 전차와 장갑차를 보유한 채 아른헴에 주둔, 휴양을 취하고 있던 독일 제2기갑군단의 병사들에게도 잘 보였다.

괴멸당한 연합군 공수부대



네덜란드 상공에서 연합군 공수부대원들이 강하를 시작하자 하늘은 낙하산의 꽃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낙하한 영국군을 멀리 떨어진 아른헴 대교로 데려갈 지프 부대는 지프를 실은 글라이더들이 착륙에 실패하면서 전멸했다.

이에 따라 영국군은 순전히 도보에 의지해 아른헴 대교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통신기까지 문제가 생겨 공수부대의 무선통신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같은 날 오후 2시 15분. 영국 제30군단의 전차와 장갑차들이 아른헴으로 진격을 개시했지만 출발한 지 불과 20분 만에 독일군의 반격에 막혀 진격은 중단된다. 공군의 근접지원까지 받아가면서 간신히 길을 텄지만 그 날 해가 지던 오후 5시에 30군단은 최초 목적지 아인트호벤을 15km나 남겨두고 있었다.

한편 추락한 영국군의 글라이더에서 작전 문서가 노획되었지만 독일군 사령부는 반신반의한다. 상식적으로 마켓 가든 작전은 말이 안 된다는 것. 하지만 대규모 공수부대 출현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자 독일군은 본격적인 연합군 공수부대 소탕전에 나선다.

아른헴에서는 프로스트 중령이 이끄는 영국군 제1공수사단 제2대대가 아른헴 대교 북단 점령에 성공하고 다리를 탈환하려는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퇴하지만 제1공수사단 사령부는 독일군의 기습공격으로 괴멸한다. 특히 사단장인 어카트 소장마저 행방불명이 되면서 연합군의 작전은 점점 난조에 빠지게 된다.

영국 제30군단은 작전 2일차인 9월 18일이 돼서야 아인트호벤을 점령한 미국 제101공수사단과 합류하지만 아른헴 시내에 독일군 주력부대가 모습을 나타낸다. 독일군은 프로스트 대대에 항복을 권고하지만 영국군은 거부하고, 이에 독일군의 총공격이 시작돼 시내는 쑥대밭이 됐다.

영국 제1공수사단장은 사령부 괴멸 후 민가에 숨어 지내다가 9월 19일 부대에 복귀하지만 이미 증원, 보급, 통신 모두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여기에 독일군에 의해 사단 주력과 프로스트 대대가 양분돼 버리고 만 사실도 알게 된다.

같은 날 30군단은 예정보다 36시간이나 늦게 네이메헨의 미 제82공수사단과 합류에 성공하지만 30군단이 건너야 하는 바알 강의 네이메헨 다리는 아직도 독일군의 수중에 있었다. 이 다리를 공격하기 위해 후방에서 보낸 캔버스제 보트는 이튿날인 9월 20일 낮에나 도착했다.

제82공수사단은 이 허술한 보트를 타고 총 개머리판으로 노를 저어 가면서 독일군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바알강 도하에 성공, 독일군을 격파하고 네이메헨 다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아른헴까지는 18km가 남았다.

아른헴 대교 북단을 점령한 프로스트 대대는 영국 제1공수사단 사령부와 연락을 회복하지만 프로스트 대대를 도울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목표인 아른헴 다리에 도착한 유일한 영국군 부대였던 프로스트 대대는 9월 20일 2시간 동안의 임시휴전을 통해 대대장을 비롯한 전투 불능의 부상병들을 독일군에 인도하고 잔여인원은 끝까지 싸우다 21일 아침 독일군의 공격으로 괴멸 당했다.

당초 19일 출격하기로 돼 있었던 폴란드 공수부대는 기상악화로 출격을 연기하다 21일 도착하지만 잔뜩 독이 오른 독일군은 그들이 낙하산을 채 벗기도 전에 발견해 사격을 퍼부어 댔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폴라드군은 야음을 틈타 고무보트를 이용, 강 건너 영국 공수부대를 지원하러 가지만 독일군의 맹공격으로 괴멸 당한다.

연합군은 아른헴에 고립된 영국 공수부대에 계속 보급물자를 투하하지만 대부분이 독일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30군단도 아른헴을 코앞에 둔 채 독일군의 반격으로 길이 막혔다.

이후 3일 동안 아른헴의 영국군은 독일군의 맹공격 아래 무너져 갔고, 결국 작전개시 8일 후인 9월 25일에야 철수명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한 인원은 아른헴에 강하했던 1만여 명 중 2,000여 명에 불과했다.

영국군의 몽고메리 원수는 작전 목표의 90%가 달성됐다며 기뻐했지만 아른헴 대교- 끝까지 점령하지 못한, 문자 그대로 머나먼 다리였다- 가 점령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머지 목표는 독일 본토 공략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켓 가든 작전 실패의 여파

마켓 가든 작전은 연합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대표적 실패 작전이었다. 연합군의 전사자만 보더라도 영국군 6,484명(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 인원 1,130명 포함), 미군 558명, 폴란드군 96명이 전사했다.

여기에 실종과 포로를 합치면 인명손실은 1만7,827명에 달한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사자 2,000명을 포함해 8,000명 선으로 추측된다.

이 엄청난 손해의 대가로 얻은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80km의 도로였을 뿐이었다. 아른헴은 1945년 4월이 되어서야 캐나다 제1군단에 의해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됐다.

본래 전차나 장갑차 등으로 구성된 기갑부대는 동급의 보병부대보다 통상 3배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10배 이상의 화력차이가 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게다가 공수부대는 낙하산 강하를 해야 한다는 특성상 화력이 일반 보병부대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공수부대를 이용, 적의 대규모 기갑부대와 정면승부를 하게 한다는 것은 개미와 거인의 대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합군 수뇌부는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지나친 자신감으로 독일군 1개 기갑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아른헴으로 영국 공수부대 1개 사단을 밀어 넣었고, 취약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아군 기갑부대의 적절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괴멸됐다.

또한 시내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아른헴은 그야말로 초토화 됐으며,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아른헴 대교는 결국 전쟁 중에 파괴됐다. (이 다리는 1978년 9월 ‘프로스트 중령’ 다리라는 이름으로 재건됐다.)

미영 공수부대가 낙하했던 아른헴과 아인트호펜, 네이메헨 등에는 마켓 가든 작전을 기리는 수많은 유적과 전쟁기념관이 있다.

이 작전에 참가한 미 제82공수사단도 선배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포트 브래그에 있는 낙하훈련장 이름을 ‘홀랜드’, ‘네이메헨’, ‘네덜란드’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켓 가든 작전으로도 뚫지 못한, 독일 본토로 가는 길은 결국 공수부대와는 별 상관없는 일반 보병들의 처절한 소모전을 통해 열리게 됐다.

글_이동훈 칼럼리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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