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첨단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창조해 내는 것.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 같은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실현시켜줄 가짜 세상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시대에서 가상현실은 더 이상 몽상이 아니다.
교육, 군사, 건축, 의료, 오락, 영상산업 등 현실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삶의 일부가 된지 오래다.
자료제공 :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지난 2005년 개봉된 영화 ‘간 큰 가족’에서 두 아들은 간암 말기인 아버지를 위해 남과 북이 통일된 가짜 세상을 조작해낸다.
유서에 따라 통일이 됐을 경우에만 유산 50억원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두 아들은 연기자를 고용, 가짜 뉴스와 가짜 신문을 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남북통일 탁구대회, 평양 교예단 서울공연에 이르기까지 온갖 황당한 일들을 몸소 실천하며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여 낸다.
이 같은 영화 속 가짜 세상은 첨단 과학기술이 아닌 사람의 힘(거짓말)에 의해 구현됐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대 과학이 추구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분명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상, 시각과 후각을 비롯한 오감(五感)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가상의 세상,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시켜 주는 행복 만점의 유토피아적 세상.
바로 이것이 인류가 수 백 년 전부터 꿈꿔왔던 가상현실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뇌를 속여라
인간이 우리 주변에 펼쳐져 있는 현실을 현실이라고 자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각의 힘이다.
만일 우리에게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음은 물론 내 자신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분간이 안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실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오감을 통해 느끼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뇌는 어떤 감각을 접하는 순간 이 감각을 느끼게 해준 대상(현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느껴지는 감각을 경험이라는 이름의 정보로 뇌의 한 구석에 저장할 뿐이다.
사실상 뇌에게는 실생활에서 직접 몸을 부딪쳐 가며 얻은 감각 정보와 꿈에서 느낀 가짜 감각 정보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꿈에서 귀신을 보았을 때 실제로 식은땀을 흘리는 등 신체가 마치 현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뇌의 무지함(?) 덕분에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망상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차원의 현실 세상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뇌가 현실인 것처럼 감각적으로 느끼도록 해주는 것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상현실의 핵심이 거짓 감각정보를 제공해 뇌를 속이는 것이라면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속임수는 시각이다. 무엇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이 현실을 인식하는 첫 출발점이 되는 탓이다.
일례로 우리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조작돼 만들어진 합성사진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곧 현실’이라는 경험적 믿음이 조작된 사진마저 진실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가상현실을 구현하려면 정교한 합성사진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실제처럼 보이는 사진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다.
그래서 합성사진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할 필수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공간성’이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모든 시각 정보는 입체이지 평면은 전혀 없음을 생각하면 왜 공간성이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가상현실 상에 표현된 이미지들은 각각의 픽셀(pixel)들에 고정된 값이 지정돼 있지 않다. 보는 사람의 공간적 관계, 즉 시각에 맞춰 최적의 상태로 수정될 수 있는 유동적 값이 매겨져 있다.
시각정보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좀 더 확실한 방법으로는 ‘두뇌 장착형 디스플레이(Head Mounted Display)’를 꼽을 수 있다.
시각, 청각, 촉각이 복합적으로 제공될 경우 우리의 뇌는 가짜 현실도 진짜로 믿게된다.
평면적 이미지가 아닌 3차원(3D) 입체 이미지를 제공하는 이 장비를 활용할 경우 한층 용이하게 뇌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시각정보가 완성되면 이제는 청각이다. 사실 소리가 없는 현실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청각은 뇌 속임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게다가 시각은 눈을 감거나 가리게 되면 사라지지만 청각은 이 같은 능동적 제어가 불가능하다. 잠을 자고 있는 순간에도 청각은 열려있다.
또한 청각은 단순히 귀로 들은 정보를 통해 사람의 말소리인지, 동물 소리인지, 기계 소리인지를 구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리의 크고 작음이나 방향 등을 기반으로 공간적 정보까지 함께 제공받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음향 합성기술은 가짜 현실을 창조해 내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의 요인이 된다.
여기에 촉각 정보까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인간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만지고, 쥐고, 두드리며 현실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시각, 청각, 촉각이 복합적으로 제공되는 상황이라면 뇌는 진짜 현실과 가짜 현실의 구분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정확히 말해 뇌가 자신에게 제공된 감각 정보들의 진실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정보를 현실로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상현실은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각종 감각정보들을 재현, 뇌가 이를 하나의 ‘현실’로 인식할 때 구현된다.
행복 없는 가상현실은 필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류가 그토록 오랜 시간 가상현실을 꿈꿔왔던 바탕에는 유토피아(utopia)를 경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유토피아는 사전적 의미의 그것보다는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다소 엉뚱한 소망들을 성취할 수 있는 세상, 즉 내 맘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의 의미가 더 강하다.
우주여행, 하늘 날기, 슈퍼맨이나 신(神) 되기, 성별 바꿔보기, 사이버 섹스 등 친한 친구에게조차 선뜻 말하기 어려운 혼자만의 비밀스런 소망들 말이다.
비약이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완벽한 가상현실 장치가 개발돼 그 어떤 세상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공짜라면 몰라도 굳이 돈을 지불해가면서까지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와 같은 점잖은(?) 세상을 경험해 보려는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 않을 것이다.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최소한 엉뚱하고 민망한 개인적 경험을 원하는 사람보다는 적을 것이 자명하다.
우리가 가상현실로 느껴보고 싶은 것은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 꿈처럼 행복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힘을 빌려 구현했던 1990년대의 가상현실이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컴퓨터 공학자들이 가상현실 체험관, 가상현실 박람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일반인들에게 가상현실 세상을 맛보게 해줬지만 그 뿐이었다.
아름다운 꽃을 만져보거나 따뜻한 햇살 속을 거닐 수는 있었어도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그곳에 ‘현실’은 있었지만 ‘행복’은 없었던 게 문제였다. 사람들은 경이로움만 존재하고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이 가상현실에 실망했다.
비록 가상현실로 얻어낸 행복이 마약을 하는 것처럼 일시적인 현실도피에 불과할지는 몰라도, 또한 과학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이 영화 매트릭스처럼 인간을 가상의 세계 속에 가둬놓을 지라도 대중이 갈망하는 현실은 바로 그런 현실이다.
결국 가상현실은 넘기 힘든 기술적 문제와는 별도로 행복감이라는 기본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가짜가 만들어낸 진짜 세상
물론 현재의 과학기술로 이 같은 세상을 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현 기성세대들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공상과학(SF)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느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상현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맞물려 급속도의 진전을 거듭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 태어나고 있는 아이들은 완벽한 가상현실의 단물을 맛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현재 인류가 구현할 수 있는 가상현실의 수준은 어디까지일까. 우리가 원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미 가상현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현실 속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분야는 군사 및 항공 업계.
지난 1985년 미 항공우주국(NASA)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공간을 가상현실로 재현, 우주비행사들의 교육에 활용한 이래 군사 및 항공 업계는 각종 비행교육 및 훈련에 가상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운용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실제 전투기(항공기) 내부를 똑같이 재현한 시뮬레이터는 주·야간 비행, 악천후 비행, 장비고장,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등 다양한 상황을 재현함으로서 조종사의 능력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다.
군사 분야의 경우 비행기를 넘어 함정이나 잠수함 등의 교육·훈련에 가상 시뮬레이터의 활용이 확대되고 있으며 무기체계 모의훈련, 각종 정비교육 등에도 관련시스템 도입이 이루어진 상태다.
덧붙여 가상의 전쟁 상황을 설정, 시뮬레이션을 통해 군 부대의 전투능력을 시험하는 워 게임(war game)도 군 분야의 대표적 적용 사례의 하나다.
건축업계 또한 가상현실의 역할은 지대하다. 설계 단계에서 3D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 건물이 완공된 후의 모습을 미리 확인함으로서 구조설계 및 내·외부 인테리어 디자인을 적절히 선택할 수 있다.
건물의 환경성이 중시되기 시작하면서는 주변 경관과의 어우러짐, 각 층별 조망과 시간대별 일조량 분석, 조경공사 등에도 가상현실 시스템이 사용되고 있다.
의료계 역시 최근 들어 의사들의 교육과 환자 치료에 가상현실을 잇 따라 도입하고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을 비롯한 다수의 의과대학들은 3D 가상인체를 대상으로 봉합, 절개, 내시경 삽입 등 까다로운 수술 기술을 연습하는 수술 시뮬레이션을 도입했다.
또한 광장 공포증, 비행 공포증, 정신 분열증, 강박증, 자폐증 등 각종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사회적응 훈련에도 가상현실 치료법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영동세브란스 신경정신과에서는 가상현실로 길눈이 어두운 ‘길맹’을 퇴치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특정산업에 속해 있지 않은 일반인들의 가상현실 체험 기회도 확대되고 있다.
먼저 게임업계에서는 유명한 ‘세컨드 라이프’가 성공하면서 사이버 상에서 제2의 삶을 살 수 있는 수많은 아류작 가상현실 게임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현재 개발완료 단계에 있는 3D 모니터, 3D TV가 출시되면 그 인기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또한 건설사들은 아파트를 분양할 때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모델하우스를 만드는 대신 현장을 찾아가지 않고도 아파트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3D 사이버 체험관’의 활용을 확대하고 있는 추세다.
인터넷 쇼핑몰 운영업체들의 경우 의류판매에 ‘3차원 피팅(fitting)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 고객의 신체 사이즈와 동일한 아바타에 자신이 고른 옷을 입혀볼 수 있는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신세계 백화점이 골프웨어 엘로드 매장에서 시범 서비스 중이다.
이외에도 스크린 골프장, 스크린 운전연습장, 방송사들의 선거방송용 사이버스튜디오 등도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분명 가상현실의 일종이다. 현실을 모방해 재현한 가짜현실이 다양한 산업에 적용되면서 또 다른 진짜 현실이 되어버린 셈이다.
전문가들은 미래의 가상현실과 관련해 감각 재현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면 우선은 집에 앉아 외국대학의 강의에 참석하거나 해외유적을 탐방하고 우주여행을 경험하는 등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복제하는 식의 서비스가 개시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사이버섹스, 돌아가신 부모와의 만남, 천당(天堂) 경험 등과 같은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단계로 진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글_ 박상우 게임평론가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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