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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치료의 대가

공포는 인간의 두뇌 속 편도체에서 통제된다. 이 부위에서 두려움을 만들어 내면 그 어떤 이성적 판단도 완전히 무시된다. 미국 뉴욕 대학의 조셉 르듀 박사는 이 같은 공포감을 제거해 주는 공포 치료의 대가(大家)다. 그는 공포의 근원인 과거의 기억을 차단, 공포 유발을 막는다.

기억 속에 각인된 공포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살았었던 사람이라면 이름 모를 거미들이 집안 구석구석에 거미집을 지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가구 밑에서, 때로는 책상 위에서 8개의 다리가 달린 이 불쾌한 생물체와 맞닥뜨리기도 했을 것이며, 천정에서 외줄을 타고 내려오는 거미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기겁을 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방 청소를 자주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이었던 데다 운까지 정말 없었다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방금 알에서 깨어난 것 같은 엄청난 숫자의 새끼 거미들이 방바닥을 가로질러 행진을 하는 소름 돋는 광경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아마 어린 마음에 이 거미들이 밤의 어둠을 틈타 귀속으로 기어들어 와서는 끈적거리는 알을 낳아 자신을 먹이로 삼을 수도 있다는 공상과학 영화같은 상상에 빠져 매일 밤 불안한 잠을 청했다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닌 상황임에 틀림없다.

실제 이러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낸 경우 성인이 돼서도 거미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는 사례가 많다. 머릿속 깊은 곳에 거미가 두려운 존재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퀴벌레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대담함을 보이면서도 거미와 직면하면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이곤 한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대부분은 이처럼 과거의 무서웠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경험은 실제 겪었던 것은 물론 영화나 꿈에서 간접적으로 느낀 것들도 포함된다.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등 특정 사물이 아닌 공간에 대한 공포감 역시 유발 메커니즘은 거의 유사하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포의 대상과 직접 맞서는 ‘노출 요법’이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거미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서는 거미를 직접 만져보거나 자주 접해보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쥐나 뱀, 바퀴벌레 등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어떨까. 이들 또한 동일한 방법을 사용해야만 할까. 다행히도 그럴 필요는 없다.

공포 치료의 대가로 전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 뉴욕 대학의 신경과학자 조셉 르듀 박사는 노출 요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일례로 고소공포증 환자를 강제로 비행기에 태웠다고 상상해보자. 환자는 공포를 극복하기는커녕 완전히 미쳐버려 정신병원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더 크다.

르듀 박사는 이 같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확실히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공포가 각인돼 있는 뇌 속의 기억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는 20여 년간 인간의 뇌를 심도 깊게 연구한 끝에 지난해 쥐를 활용한 실험으로 이것이 실현 가능함을 증명해냈다.

다른 기억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특정한 고통스런 기억만을 없애버린 것. 그는 또 이 방식으로 기억을 말소함으로서 공포감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까지 입증했다.

인위적으로 특정 기억만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과학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평생토록 고통 받는 상이용사들과 강간 피해자들에게 정상적인 삶을 영위토록 해 주는 것들 말이다.

이에 다수의 과학자들이 발 빠르게 르듀 박사의 연구 성과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연구팀은 이미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돌입했으며, 한 신생기업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공포 제거 서비스라는 이름의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공포의 근원 ‘편도체’

뉴욕대 신경과학연구센터 11층에 있는 르듀 박사의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면 그의 ‘공포 공장’으로 들어가는 두꺼운 유리문을 만나게 된다.

이 문 안쪽에는 300여 마리의 통통한 실험용 흰 쥐들이 투명 아크릴로 만든 우리 속에서 왕족이 부럽지 않은 호화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다.

이들에게는 최고급 사료와 정수기의 물이 제공되고 있으며, 산소가 풍부한 공기가 별도로 공급된다. 또한 외부의 병원균에 의해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연구원들은 반드시 무균복을 입고 수술 마스크까지 써야 한다.

이곳의 연구원 마리 몬필스 박사는 “모든 쥐들은 엄격한 내부 규정에 맞춰 관리되고 있다”며 “정신적으로 안락하고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한 상황에서 공포를 느낄 때 쥐들의 반응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쥐나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공포를 느끼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뇌의 감정중추인 편도체(amygdala)를 알아야 한다.

눈 뒤의 전뇌부에 위치한 편도체가 바로 감정과 기억을 뒤섞어 공포라는 이름의 괴물을 창조해 내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르듀 박사가 이 편도체 연구를 처음 시작한 시기는 쥐의 뇌가 어떻게 위험성을 인지하는지 연구하던 지난 1970년대부터다.

당시 그는 쥐에게 특정한 소리를 들려주면서 그때마다 약간의 전기충격을 가했다. 이를 몇 차례 반복하자 쥐들은 소리만 듣고도 무서움을 느끼며 몸이 얼어붙었다.

여기까지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이론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현상으로서 르듀 박사도 사전에 예상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쥐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이들의 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확인했다.

그 결과 귀가 들은 청각신호를 전달받는 뇌의 청각시상(auditory thalamus)이 편도체와 곧바로 연결돼 있음을 발견했다.

또한 이들의 연관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청각시상과 편도체와의 연결을 차단하자 아무리 소리를 들려줘도 쥐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공포의 근원이 편도체임을 밝혀냈다.

르듀 박사는 “연구를 통해 뇌의 편도체가 ‘공포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주관자라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이 공포기억이 활성화될 경우 이성적 사고기능을 비롯한 그 어떤 뇌 활동 보다 먼저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거미 공포증 환자들이 거미를 봤을 때 그 거미가 괴물로 변해 자신의 팔을 뜯어먹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리기도 전에 비명부터 터져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편도체의 힘을 빌려 공포감이 생각을 앞지르는 것이다.

편도체에 공포의 기억이 없다면, 혹은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당연히 이 연결고리는 끊어진다. 르듀 박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문제는 이를 위해서는 특정 기억을 선택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것.

자칫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면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이 선택적 기억제거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르듀 박사는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뇌 마니아

르듀 박사는 58세의 학자치고는 꽤 유행에 민감한 인물이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머리는 뒤로 멋지게 빗겨 넘겨져 있고, 아래턱에는 애교 수염을 기르고 있다.

고무 샌들을 신고 검은색 청바지와 라임 색 셔츠를 입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연구실에 틀어박혀 현미경이나 들여다보는 과학자라기보다는 마치 로큰롤 가수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작사, 작곡, 연주까지 다 해내는 그의 밴드 이름은 편도체며 모든 곡은 신경과학을 노래하고 있다.

그가 뇌라는 것을 처음 접한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운영하던 정육점에서다. 당시만 해도 동물을 도살할 때는 총으로 머리를 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소의 뇌 속에 박혀있는 총알을 빼내는 일을 그가 맡았던 것.

부드러운 소의 뇌수를 헤집던 어린 르듀는 자신의 손이 닿아있는 뇌의 부분이 소가 살아있을 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막연한 궁금증을 갖기도 했다.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르듀 박사는 루이지애나 주립대(LSU)에 입학, 부모님의 뜻에 따라 마케팅을 공부했다.

또한 자신의 학구열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자심리학도 배웠다. 이를 통해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심리학이 얼마나 유용한지 몸소 체감했다.

마케팅 분야의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같은 대학 심리학과 교수였던 로버트 톰슨 박사의 눈에 들어 그의 실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기억의 근원’에 대한 실험을 처음 접했다.

생물심리학 박사 과정을 가까스로 이수한 후 류듀 박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뉴욕 대학 스토니브룩 캠퍼스에 정착했다. 그를 교수로 임용할 의사를 밝힌 유일한 학교가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과학자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공포심이 어떤 실체를 갖고 있으며, 뇌 속의 신경망에 존재하고 있다는 르듀 박사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감정이 복잡한 심리학적 현상일 뿐이며,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힐 수 있는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르듀 박사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모든 동물의 공통적 기본 감정의 하나인 ‘공포심’이야 말로 가장 손쉽게(?) 분리해 낼 수 있는 감정이라고 판단,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결국 르듀 박사는 이후 30년 동안 뉴욕 대학과 코넬 대학 의대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공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2권의 책을 저술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기억과 공포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짝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수 십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해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기억을 제거하라

르듀 박사의 연구실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답을 찾아내는 다양한 분야의 박식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흰쥐를 고양이처럼 팔에 안고 다니면서 다독여 공포를 잊게 만들었다는 몬필스 박사도 그 중 한명이다. 그녀는 이 쥐의 두개골을 절개, 자신의 노트북으로 쥐의 모든 뇌 활동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마이크로칩을 이식해 놓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난해 르듀 박사는 이 괴짜 연구원들과 함께 수행한 공포실험 결과를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지에 발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쥐에게 고음의 부저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를 들려주고 공포 반응을 유도하는 실험이었는데, 연구팀은 먼저 쥐에게 이 두 소리를 모두 20회 들려주고 전기 충격을 가했다.

이 같은 과정을 3번 반복하자 생쥐들은 소리만 듣고도 두려움에 떨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후 연구팀은 쥐들에게 귀뚜라미 소리를 들려주면서 기억 형성을 억제하는 화학물질인 UO126을 투여했다.

이렇게 24시간이 흐르자 쥐들은 이제 부저 소리에만 공포반응을 보일 뿐 귀뚜라미 소리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약물을 통해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전기충격을 받았던 과거의 공포 기억이 삭제된 것이다.

이에 대해 르듀 박사는 “이 실험은 기억이 두꺼운 유리벽 속에 갇혀있는 고정 불변의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 사례로서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며 “기억이란 살아있고 변화하며 매번 재생될 때마다 조작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공상과학 소설처럼 들릴 수 있어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기억일수록 손쉽게 바꿀 수 있다”며 “특히 부저 소리는 남겨놓고 귀뚜라미 소리에 대한 기억만 없앤 것에서 알 수 있듯 특정 기억만 변경, 삭제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것이 최대 성과”라고 덧붙였다.

르듀 박사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애초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다.

즉 좋은 기억이던, 나쁜 기억이던 기억을 하면 할수록 매번 기억의 내용이 조금씩 바뀔 가능성이 높다.

공교롭게도 이 같은 사실은 외계인에 의해 UFO로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짓말탐지기 테스트를 통과하는 일명 ‘외계인 피랍자 현상’을 신경과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육체적으로 탈진한 상태에서 자신이 상상한 경험을 계속해서 회상하게 됨으로서 실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까지 사실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

어쨌든 르듀 박사의 실험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신경과학계는 신속한 반응을 보였고, 기존의 상담 요법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비합리적 방법이며 효과마저 의심스러운 것으로 격하되기까지 했다.



약물주사 한 대만 맞으면 지우고 싶은 공포 기억이 모두 사라지는데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정신과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 정신의학과의 로저 피트만 교수는 “기억은 찰흙 반죽 같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어 그대로 놔둘 수도, 모양을 바꿀 수도 있다”며 “이론적으로 공포기억은 물론 어제 먹은 저녁 메뉴처럼 평이한 기억들도 변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PTSD 환자가 지닌 충격적인 기억을 약화시키는 프로프라놀올(propranolol)이라는 약을 실험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가장 최근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바뀔 수 있다.









공포 상황에서의 뇌 반응

쥐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쥐가 눈앞에서 달려가는 모습을 목격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정보는 가장 먼저 시상에 보내지는데[A], 시상은 곧장 이를 편도체와 시각피질에도 전달한다.[B], [C] 편도체는 제공받은 정보와 과거의 공포기억을 대조, 시상하부에 그에 맞는 신체행동을 취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다.[D] 그동안 시각피질은 시각정보를 바탕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사고처리 작업을 하지만 이 합리적 사고는 편도체의 즉각적 반응보다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이미 신체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반응을 하게 된다.[E]

(사진설명: 1. 시상하부 2. 시상 3. 시각피질 4. 편도체 5. 눈)

공포 억제 약물의 작용기전

D-사이클로세린(DCS)과 같은 약물은 오랫동안 각인돼 있는 불쾌한 공포기억 억제에 도움을 준다. 이 약물은 편도체 내에서 세포 간 의사소통을 유도하는 NMDA 수용체를 활성화시켜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DCS의 약효가 나타날 때 쥐가 등장하는 비디오를 보게 되면 과거 기억과 관련 없는 새로운 기억이 편도체에 입력되는 것. 이 경우 눈앞에서 쥐를 보더라도 편도체는 공포 반응을 명령하지 않게 된다.

(사진설명: 1. 편도체)

공포를 이겨내는 약

르듀 박사는 올 가을 뉴욕의 오렌지버그시에 들어설 첨단 뇌 연구센터인 감정두뇌연구소(EBI)의 총책임자로 부임할 예정이다.

이곳에서 그는 뇌의 분자 네트워크를 연구, 새로운 공포억제 요법 개발에 필요한 생화학적 단서를 찾아낼 계획이다. 특히 EBI에서는 D-사이클로세린(DCS)을 가지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진행할 계획이다.

UO126의 경우 두뇌에 직접 주입해야 하는 위험성 때문에 사람에게 사용할 수 없지만 DCS는 대표적 결핵치료제의 하나로서 이전부터 많이 사용됐던 약물이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도 받은 상태여서 인체에 투여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공포증, 공황장애, 정신분열, PTSD 등의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이 보낸 편지와 이메일이 하루에도 수 십 통씩 답지하고 있어 실험 참가자를 구하는 것도 문제없는 상황이다.

DCS는 과거의 기억을 차단하는 UO126과는 반대로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는데 효과가 있지만 2가지 모두 결과적으로는 환자들에게 비슷한 효과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공포치료제로서의 활용성을 인정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DCS는 뇌에서 기억 형성을 촉진하는 N-메틸-D-아스파르트산염(NMDA) 수용체를 자극한다.

이 수용체는 편도체가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때나 기존의 기억을 다시 떠올릴 때 작동하는데, DCS가 이를 자극해 극도로 활동적인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 이로 인해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과 전혀 관련없는 새 기억을 왕성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미국 애틀랜타 소재 에모리 대학의 정신의학 및 행동과학과 교수인 마이클 데이비스 박사는 이 DCS를 사람에게 실험한 최초의 과학자다.

그는 고소공포증 환자에게 DCS를 투여한 다음 외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빌딩을 오르는 가상현실을 경험케 했다.

그 결과, 환자들은 처음엔 엘리베이터가 높이 올라갈수록 두려움을 표시했지만 실험이 반복되자 과거의 무서웠던 기억이 현재의 안전하고 편안한 기억으로 대치됐다.

DCS 복용 환자와 위약 복용 환자들을 비교했더니 무려 4배나 높은 공포 억제효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데이비스 박사는 현재 참혹한 전쟁을 겪은 300여명의 PTSD 환자들을 대상으로 DCS가 이들의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최신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미 온라인상에 여기저기서 총탄이 빗발치고 폭발물이 터지는 가상의 이라크 전장을 재현했다.

이를 이용해 환자들을 적에게 공격 받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한 뒤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기 전에 DCS 알약을 제공, 기억의 변화 여부를 알아볼 계획이다.

뉴욕 대학의 신경과학자인 제이섹 데빅 박사 또한 PTSD에 시달리는 참전용사들을 위해 르듀 박사 연구팀과 공동으로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고 있다.

이들은 실험 참가자들의 몰입을 위해 시각적, 청각적 정보는 물론 촉각적, 후각적 자극까지 제공하는 강력한 가상현실시스템을 운용할 예정이다.

애틀랜타의 디과 테라퓨틱스사는 이와 관련해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는 곳으로 꼽힌다.

제약회사 중역 출신인 해롤드 슐레빈 사장이 지난 2006년 창립한 이 회사는 PTSD, 공황장애, 강박신경장애(OCD)를 비롯해 뱀, 거미, 고소, 폐쇄, 대인 등 거의 모든 공포증을 치료하는 DCS 약을 개발하고 FDA의 승인을 받기 위한 임상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버추얼리 베터라는 가상현실시스템 개발업체와 공동으로 시뮬레이션을 개발 중이며, 이를 DVD에 담아 DCS 캡슐과 함께 ‘가정용 자가 치료 세트’로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DVD에는 제트 여객기의 내부, 고층 엘리베이터, 사람이 꽉 들어찬 강당 등 다양한 공포상황이 들어있다. 심지어 강박신경장애 환자를 위해 화장실 변기 시트까지 만져볼 수 있다.

슐레빈 사장은 “2009년 연말이나 늦어도 2010년 초에는 이 치료세트를 상용화할 수 있을 전망”이라며 “당연히 이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처방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큰 기대, 큰 위험

디과 테라퓨틱스의 임상실험은 DCS를 공포 억제제로 사용했을 때 다른 기억이나 인식 능력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르듀 박사는 이것을 일보 전진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연구자들은 인위적인 기억제거 요법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릴 수 있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걱정스런 전망을 내놓고 있다.

복잡한 기억의 경우 뇌의 여러 부위에 걸쳐 수많은 뉴런들이 관련돼 있으며, 하나의 뉴런이 동시에 여러 가지 기억을 붙잡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편도체에 있는 공포 기억을 변조하다가 뇌의 다른 부분에 있는 평범한 기억까지 제거될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다.

공포가 더 악화되거나 그 공포와 관련돼 있지만 유익한 기억까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자칫 고소공포증을 없애려다가 환자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다리에서 투신이라도 한다면, 또한 거미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다 일부 거미에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지식까지 잃어버린다면 어쩌란 말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공포는 뇌 전체를 아우르는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연계돼 있다.

이 공포 본능은 위험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물론 언젠가는 인간이 두뇌에서 공포, 감정, 기억을 조절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을 연마하게 될 것이다.

이때에 이르면 이러한 문제는 극복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그 단계에 올라 있지 않다. 인간의 뇌 시스템은 광활한 우주만큼 신비 그 자체다.

르듀 박사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우리가 뇌를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이종(異種)의 시스템들이 묶여있는 존재가 아닌 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여기고 이해하는 것만이 이같은 기술을 획득하는 길이라고 단언한다.

르듀 박사는 “각각의 인간은 단순히 지각, 공포기억, 사고, 감정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고차원적 존재”라며 “두뇌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뇌 연구를 통해 앞으로 풀어야할 큰 숙제”라고 강조한다.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조사 대상자 중 무려 50%가 뱀 공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들의 36%는 고소공포증, 27%는 거미공포증, 18%는 비행공포증이 있다고 밝혔다.

늦어도 2010년 초에는 D-사이클로세린(DSC)약물에 기반한 가정용 자가 공포치료세트가 상용화 될 전망이다.

HOW IT WORKS

인체의 공포 반응

공포는 외부의 위협에 대비, 신체의 안전을 유지하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공포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는 건강에 매우 해롭다.

1. 눈

노르에피네프린과 같은 ‘도피-투쟁 호르몬(fight-or-flight hormone)’들이 동공을 확장시켜 시야를 넓힌다.

2. 심장

심박동 상승으로 혈압이 높아져 혈중 산소 전달 속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고혈압 상태가 지속되면 심장발작이나 심장마비가 올 가능성이 있다.

3. 폐

호흡 횟수가 빨라지면서 폐에 더 많은 산소가 공급된다. 장기간에 걸친 잦은 스트레스는 천식을 악화시킬 수 있으며, 과도한 호흡에 의해 공황 발작이 초래될 수도 있다.

4. 피부

땀샘이 열려 체온을 낮춘다. 하지만 장기간의 스트레스는 피부의 상처 치유 능력을 떨어뜨려 감염 가능성을 높인다.

5. 호르몬

콩팥 위에 위치한 부신(adrenal gland)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과도한 코르티솔 분비는 뼈와 근육을 약화시키고, 인체의 면역체계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

6. 위

소화 운동에 쓰이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소화기능을 중단한다. 이렇게 소화가 지연되면 위산과다로 인해 구역질과 궤양이 유발된다.

7. 장

스트레스가 가해지는 동안에는 장에 피가 공급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소화가 억제되면 과민성 대장질환이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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