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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 기자의 그림 이야기] 모방과 창조 그리고 그림의 계보

그림의 독창성은 대부분 선배 화가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비첼리오 티치아노의 전원의 합주에서 영감을 얻어 온 것이고, 올랭피아 역시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방한 것이다.

고흐 역시 밀레에게서 작품구성과 정신적인 이념을 전해 받았으며,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로부터 색채 기법을 전수받는다.

모방과 창조는 그림 세계의 어엿한 영역이며, 이를 통해 그림의 계보 역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예술세계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독창성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거나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선배 작가들에게서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의미다.

실제 피카소가 창안한 입체파는 인상파 작가였던 세잔에서 출발했으며, 앤디 워홀에 의해 탄생한 팝아트는 대중문화와 만화를 근거로 하는 등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시작된 서양미술도 모방과 창조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인상파 시대 작가들 중 에두아르 마네 (1832~1858)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걸작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 계보를 들여다보자.

여성 누드의 변천사

시대를 앞서 나가는 천재는 외롭다고 했던가. 마네의 작품은 성적으로 도발적이라는 당대 비평가들의 혹평과 건전하지 못하다는 대중의 따가운 질책을 면하지 못했다.

마네의 화법은 이미 점잖은 당대의 규범을 한참 벗어나 보수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파리 화단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 시대를 앞서나가 질책 받았던 작품으로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0)와 ‘올랭피아’(1865) 등이 있다.

두 작품은 모두 도발적이고 외설적이라 당시 비난의 표적이 됐다. 특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1863년 화단의 퇴짜를 맞아 낙선전(落選展)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낙선전이란 관선(官選) 전시회에서 낙선된 작품을 모아 그 전시장과 이웃한 곳에서 개최했는데, 관선 전시회의 심사가 편견적이라는 전위적 예술가들의 주장에 호응해 나폴레옹 3세에 의해 기획됐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르네상스 대표 작가인 이탈리아 출신의 베첼리오 티치아노(?~1576)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전원의 합주’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그림을 보면 옷을 입은 남자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는 동안 풍만한 몸을 드러낸 한 여인이 물을 따르고 있다. 또한 한 여인 역시 벗은 채 악사들과 함께 앉아 있다.

이 작품은 당시 경외의 대상이었던 자연에 인간이 한걸음 다가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원의 합주는 당시 경외의 대상이었던 자연에 인간이 한걸음 다가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원의 합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전통적인 종교화나 성화에 등장하는 여신들의 모습을 하고 있어 외설적이라는 비난은 없었다.


전원의 합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전통적인 종교화나 성화에 등장하는 여신들의 모습을 하고 있어 외설적이라는 비난은 없었다.

풍만한 몸매를 하고 있지만 에로틱하다는 느낌을 갖기는 어려운 것도 종교화에 등장하는 여인의 나신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 따라 그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다르다. 그림에는 풀밭 위에서 점심을 먹겠다고 야외에 나온 두 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한 여인은 벗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고, 그런 여인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는 매끈한 정장의 남자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자칭 그림 그리는 가수인 조영남씨는 비현실적인 장면의 이 그림을 두고 현대미술의 시발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마네는 종교화와 신화를 그렸던 티치아노가 묘사한 전원의 합주에서 극적인 장면을 빌려왔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인 상황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이 작품을 보고 당황했고 수치심과 모욕감마저 느꼈다고 전해온다. 특히 벗은 여인의 눈빛이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조롱하는 듯해 더욱 불온한 작품으로 치부됐다.

평론가들의 비난도 쏟아졌다. “마네는 부르주아를 공격함으로써 유명해지려고 했던것 같다”, “그의 취향은 기괴하고 타락했다” 등등.

마네는 작품을 통해 점잔은 척하는 관람객들에게 생동감 넘치는 현실과 에로틱한 재치를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예술을 근엄한 것, 혹은 국가적 자존심이나 서사적 사건 등 고귀한 정서와 연결하는 비평가들이 마네의 뜻을 읽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올랭피아와 우르비노의 비너스

그의 또 다른 걸작인 올랭피아는 1865년 어렵게 살롱전에 채택됐다. 그는 이미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문제화가’로 낙인이 찍혔던 탓에 올랭피아 역시 제대로 된 평가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흑인 하녀를 거느린 고급 매춘부 빅토린이 캔버스 전체를 가로지르며 전라(全羅)로 누워 있는 이 그림은 노출이 심해 예상했던 대로 관람객은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비평가들의 논란도 거셌다.

특히 관람객들은 작품을 보면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달콤한 섹스를 예고라도 하는 것 같은 도발적인 자세의 매춘부 빅토린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관람객을 뚫어져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누워있는 비너스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불온한 구석이 있는 올랭피아를 그릴 때 마네가 가장 많이 참고했던 작품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스페인 출신의 궁중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옷 벗은 마하’다.

마네는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우피치 미술관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사한 적이 있다고 전해 내려온다.

마네는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 벌거벗은 창녀를 그리고, 옆에는 흑인 하녀를 세웠다. 발치에 있는 검은 고양이는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그려져 있는 개를 대신하고 있다.

흑인 하녀와 올랭피아의 몸은 흑백의 대비를 이끌어 냈고, 발끝의 고양이는 성적 쾌락의 메시지를 담았다. 영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어에서도 고양이는 여성의 성기를 암시한다.

당시 소설가이자 균형감각을 갖춘 예술평론가 위스망스는 올랭피아가 옷 벗은 마하를 보들레르 식으로 변형시켰다고 평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고양이를 매력적이지만 파괴적인 혼혈 여인에 비유했다.

올랭피아의 자세를 보면 고야의 옷 벗은 마하와도 닮았다. 초상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고야의 옷 벗은 마하는 그 동안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여성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누드화는 스페인 화단에서는 보기 드문 작품으로 밀랍 조각상 같은 빼어난 몸매인 작품 속 주인공의 자세에서 관람객은 에로틱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선후배 농부 화가, 밀레와 고흐



칼뱅주의 목사인 아버지 탓에 빈센트 반 고흐는 종교적인 신념이 강했던 화가다. 2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고흐는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청렴하면서도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좋아했다.

당시 유행했던 전통적인 종교 그림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삶을 단순하게 묘사했던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그림이 고흐에게 큰 울림이 됐던 것은 당연지사.

밀레는 ‘만종’(1857~1859), ‘이삭 줍는 여인들’(1857) ‘키질하는 사람들’(1847~1848) 등 농촌 생활과 자연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화가였다.

특히 이삭 줍는 여인들은 타작이 끝난 밭에 남은 이삭이라도 건지기 위해 모여든 빈민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밀레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어려웠던 프랑스의 현실을 반영했다는 평을 얻었다.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857년 살롱에서 소개됐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본 후부터였다.

당시 파리에 있는 숙부의 화랑에서 일하고 있던 10대 소년 고흐는 루벤스, 브뢰겔, 홀바인 등 16세기 거장들의 그림을 보면서 가슴 설랬다.

하지만 그는 중후한 초상화나 관능적인 누드보다는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작은 풍경화를 더 좋아했다.

고흐는 표면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에 담겨있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의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전원의 합주’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영향을 받았다.

단순한 전작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현실상황으로 재해석한 마네의 작품은 성적으로 도발적이라는 이유로 당대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던 고흐에게 밀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독학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시킨 고흐에게 밀레의 그림은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데 도움이 될 스승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고흐는 밀레를 창작의 아버지로 부르면서 평생 동안 예술 및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때부터 그는 밀레의 작품과 관련된 판화와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다. 밀레의 작품은 그가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데생의 교본이 되기도 했다.

고흐의 생각은 그의 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1885년 4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남아있다.

“누덕누덕 기운 흙투성이의 푸른 치마에 비바람과 햇빛에 바래서 묘한 무늬가 진 윗도리를 입은 시골 아가씨가 도시 여자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만약 그녀가 도시 여자의 옷을 걸친다면 매력은 사라지겠지.”

고흐의 그림 중에는 밀레를 따라 그린 그림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밀레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대로 모사만하고 말았다면 고흐는 지금의 명성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밀레의 작품이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고흐의 그림은 희망과 가능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인간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역경을 딛고 나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그린 것.

그 중 1888년 6월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은 고흐의 야심작 중 하나다. 작품은 파란색과 노란색, 오렌지색과 보라색, 그리고 녹색과 붉은색 등 보색을 작은 반점과 선으로 나란히 표현했다.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 홀연히 씨를 뿌리는 한 농부의 모습은 밀레의 것보다 더욱 강렬하다.

색채의 스승 들라크루아

밀레가 고흐의 작품 구성과 정신적인 이념을 세우는데 큰 영향을 줬다면, 색채 이론의 스승은 16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익히 알려진 들라크루아는 19세기 프랑스 신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당시 전통을 고수하던 화가들과 달리 색을 자유롭게 사용해 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특히 그의 색채는 이국풍의 주제와 과격한 장면, 격렬한 감성 등을 묘사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색채 기법과 자신의 임파스토(Impasto, 두껍게 칠하기) 기법을 결합하면서 그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고흐가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사한 시기는 생 레미 요양소에서 우울증과 간질로 인한 발작 증세에 시달릴 때였다.

병마와의 힘겨운 사투를 극복하고 자신도 예수처럼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 바로 ‘피에타’와 ‘착한 사마리아인’ 등이다.

피에타는 중세 말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각과 회화 등에 등장하는 기독교 미술의 주제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을 통칭한다.

낭만주의 작가 들라크루아의 ‘피에타’와 ‘착한 사마리아인’을 모사한 반 고흐는 색채의 대비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들라크루아의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어가는 예수를 안고 탄식에 젖어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고흐는 피에타를 그리면서 들라크루아의 색이라고 불리는 노란색과 파란색을 대비시켰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지만 이 작품이 많은 미술 사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됐던 이유는 따로 있다. 예수의 모습이 고흐와 닮아 있어서다.

예수의 붉은 머리와 붉은 수염이 고흐를 연상시켜 미술 사학자들은 이 작품을 두고 고흐가 자신을 고통 받는 예수와 동일하다고 간주하고 그린 작가의 또 다른 자화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역시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사한 고흐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도중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는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흐는 예수의 가르침 중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자, 고통 받는 자의 이웃으로 살고 싶어 했던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어린 시절 전도사로 활동했던 고흐가 탄광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암담한 현실을 함께하고, 임신한 채 버림받았던 창녀 시엔을 불쌍하게 여겨 동거를 했던 것도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미술 사학자들은 해석하기도 한다.

작품 속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진실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 고흐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장선화 서울경제 기자 indi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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