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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INTERVIEW] 이호왕 전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 불굴의 투지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파스퇴르

최근 신종 인플루엔자A로 지구촌이 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 8월 13일 현재 전 세계에서 18만2,166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1,799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신종 인플루엔자A 만큼은 아니지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도로 위협이 됐던 바이러스가 하나 있었다. 유행성 출혈열로 잘 알려진 신증후성 출혈열이 바로 그것이다.

주로 들쥐나 집쥐의 배설물에 들어있던 바이러스가 사람의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데, 현재도 치사율이 7%에 달하는 무서운 병이다. 이 때문에 치료제는 물론 예방 백신조차 없었던 1990년대 이전에는 아예 야외에서 함부로 앉거나 눕는 행위가 금기 시될 정도였다.

이호왕 박사는 바로 이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한탄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찾 아낸 바이러스 학계의 대부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로 과학자다.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초의학자의 대명사가 됐지만 원래 이 박사는 내과의사가 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서울대 의대 졸업을 앞뒀던 1950년대 초반의 시대 상황이 운명처럼 그와 바이러스의 만남을 이끌었다. 이 박사는 "당시 국내에는 천연두, 일본 뇌염, 말라리아 등 온갖 전염병이 들끓었다"며 "훌륭한 내과의사가 되려면 미생물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해 대학원 전공으로 미생물학을 선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맺어진 바이러스와의 인연은 곧 필연으로 바뀐다. 서울대 미생물학과 조교 시절 서울대에서 미국 미네소타 대학으로의 유학 기회를 제공했고, 그곳에서 유명 바이러스 학자였던 지도교수를 만나 석·박사를 마친 것.

예기치 못한 유학이었지만 바이러스 학자로서 이 박사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석사과정 때부터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돼지의 신상피세포에서 배양하는데 성공하는 등 탁월한 연구 성과들을 잇달아 도출해낸 것 이다.

박사 학위를 취득할 즈음에는 이미 일본뇌염 분야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박사와 한탄 바이러스의 역사적 인연은 1960년대 후반 시작됐다. 귀국 후 서울대 교수로 일본뇌염 연구를 지속했던 그가 연구 주제 변경을 결심한 것.

이 박사는 "1966년 일본에서 일본뇌염 백신이 개발되면서 일본뇌염 연구의 가치가 낮아질 것으로 봤다"며 "새로 찾아낸 연구 대상이 바로 유행성 출혈열이었다"고 밝 혔다. 그는 이어 "그 시절에는 정부 연구비가 전혀 없어 미국에서 연구비를 받아야만 했다"며 "유행성 출혈열은 10만 명에 달했던 주한미군 및 그 가족에게도 큰 위협이었기에 최적의 주제라고 여겼다"고 덧붙였다.

실제 6.25 때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발생, 유엔군 600여명을 사망케 했던 유행성 출혈열은 정전 이후에도 무수한 인명피해를 유발했다. 하지만 쥐가 매개체로 추정될 뿐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연구 주제 변경을 결정한 이 박사는 곧바로 '기다리지 말고 행동하라'는 평소의 지론을 실천했다. 직접 미 육군성을 찾아가 연구 과제를 신청하는 등 특유의 추진력과 열정을 발휘해 끝내 자금을 받아낸 것. 하지만 한탄 바이러스는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장장 5년여의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사실 유행성 출혈열의 병원체 규명은 미국이 1950년대 초부터 15년간이나 연구했던 것으로 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 200명 이상의 연구자를 동원하고도 실패한 난공불락의 영역처럼 인식돼 있었다.

유행성 출혈열은 오직 사람에서만 발병돼 인체실험을 하지 않는 한 존재를 드러내도록 할 수 없었던 것. 이를 감안하면 이 박사 자신을 포함, 단 4명에 불과했던 연구팀에게 성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고 봐도 허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에도 이 박사의 연구 열정은 식지 않았다. 난관에 부딪칠수록 투지는 더 불탔다. 그리고 이 같은 불굴의 노력에 힘입어 연구 7년 만인 1976년 세계 최초로 한탄 바이러스 발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1979년에도 서울 마포의 집쥐에서 또 다른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인 서울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 박사는 이들이 전에 없던 신종임을 입증, 이 바이러스의 속명(屬 名)을 한타 바이러스라고 명명했다.

특히 이 박사는 이 같은 바이러스의 발견에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를 활용해 진단법 '한타디아'와 예방 백신 '한타박스'까지 직접 개발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새로운 병원체를 발견하고, 그 병원체의 진단법과 백신 개발을 성공시킨 것은 세계적으로 이 박사가 유일하다.

그에게 '한국의 파스퇴르'라는 칭호가 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 이 박사에게는 연구 업적의 가치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삶 전반에서 드러나는 나라사랑 정신이다.

그의 조국애를 엿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례는 자신이 발견한 바이러스의 이름을 모두 한글로 지었다는 점이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의 과학자가 대한민국 땅에서 이룩한 업적임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며 "지금도 3개의 새로운 바이러스 명칭을 우리말로 지어 의학 및 미생물학 교과서에 영원히 남겼다는 사실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한탄 바이러스 발견 이후 미 국립보건원(NIH)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이 역시 한국에서 이룩한 업적을 미국의 업적으로 만들기 싫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이뿐만 이 아니다. 이 박사는 이미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한 뒤 정부 측에 이 연구에 대한 연구비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는 논문 말미에 어떻게든 우리나라 정부의 이름을 넣고 싶어서였다.

이 박사는 "당시 우리나라에는 외국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연구 업적이 거의 없었다"며 "실질적인 도움 여부를 떠나 연구 결실을 가급적 한국의 공으로 돌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그의 논문 말미에는 미 육군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이 적시돼 있다.

돌이켜보면 이 박사의 업적은 연구비, 연구인력, 사회 환경 등 어떤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상황에서 오직 불굴의 투지와 연구 열정, 그리고 사명감으로 일궈낸 결과물이다. 이제 원로 과학자가 된 이 박사는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그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우수한 연구결과는 결코 훌륭한 건물이나 다수의 연구원, 연구비의 규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계와 최소한의 비용 및 인력만 있어도 세계적인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며 "중요한 것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연구자 자신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포기하지 않는 투지, 그리고 실천력"이라고 강조했다.

이호왕 박사가 추천한 제4대 릴레이 인터뷰 주자는 서울대 약학대학의 김영중 교수다. 김 교수는 30여 년 동안 국내 자생식물을 중심으로 천연물을 활용한 신약물질 발굴에 매진, 다양한 후보물질을 개발하며 천연물 신약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이호왕 박사 프로필


1954 서울대 의과대학 학사
1959 미국 미네소타 대학 박사 1971~현재 대한바이러스학회 초대회장, 명예회장
1983~1985 고려대 의과대학 학장 1989~현재 국제한타바이러스학회 초대회장, 명예회장
1997~현재 한탄생명과학재단 이사장
1998~현재 대한백신학회 초대회장, 명예회장
2000~2004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2002~현재 미국 국립학술원 외국회원
2009~현재 일본 학사원 명예회원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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