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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씨의 #소소한_취미생활] <10>애니메이션 세 편에 뒷목 잡을뻔한 사연

■연상호 감독 '돼지의 왕'·'사이비'·'서울역'

지옥도 속에서 한국 사회를 보다

어제 불금을 맞아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봤습니다. 연 감독님의 ‘부산행’을 보고 궁금해서 보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 포스터엔 ‘부산행 프리퀄’이라고 적혀 있지만 기대 않고 별개의 이야기로 보는 게 좋습니다. (*이하 스포일러 없습니다.)





‘서울역’에서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이들은 서울역 노숙자들입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이들과도 같은, 사회에서 가장 외면받는 사람들이 피 묻은 이빨로 ‘시민’들의 목을 물어뜯습니다. 도움을 요청해봐도 시민들은 들으려 하지 않죠.

관람객 입장에선 초반부터 고구마 열 개쯤 흡입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 노숙자들은 더 적절한 곳, 적절한 사람을 찾아가 조리있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걸까요? 왜냐면 그들은 애초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럴 만한 사회적 지위도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노숙자들을 외면한 죄일까요. 결국 좀비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시민들도 으르렁거리며 인육을 찾아 헤매는 좀비가 됩니다. 이때쯤 시민들의 권력을 나눠 받은 정부가 개입하지만, 정작 정부는 살아남으려는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쏩니다. 영화가 현실을 너무나도 닮아 괴로워지게 되는 지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이라고 만만하게 봤다가 멘붕이 오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격인 혜선은 과거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그랬듯 좀비로부터 도망치면서도 자꾸만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고, 그런 혜선을 둘러싼 인간들은 전부 약육강식에 충실한 육식동물들입니다.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무려 3명씩이나 등장하지만 헛된 희망만 품게 할 뿐입니다.

마치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엔딩은 단 하나(=사망)뿐인 시뮬레이션 게임같더군요(…)

지하철역으로 피한다 ->사망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사망 경찰서로 도망간다 ->사망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고구마 백 개쯤 먹은 사람마냥 가슴을 치며 안절부절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잠시 위안을 준 곳, 잠시나마 진짜 집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던 모델하우스는 죽음의 숨바꼭질이 벌어지는 차가운 공간으로 변해버리죠.

마치 월드컵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우리 아빠처럼, 저도 소리질러야 했습니다. “아오 이 조카의 18색깔 크레파스야!!지하철역으로 가지 말라고!!그만 좀 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지금까지 연상호 감독님의 애니메이션을 세 편째 보고 있는 까닭은 뭘까요. 전작 ‘돼지의 왕’, ‘사이비’ 역시 지옥도 애니메이션(이거슨 새로운 장르…)입니다. 저도 주말엔 좀 신나고 즐거운 영화로 도피하고 싶은 평범한 1인이라 저런 어둠의 영화들을 보려면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곤 합니다. 다 보고 나선 여지없이 멘탈이 흔들흔들. 마치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 가며 진리를 구하는 중세의 수도사 같은 기분이랄까요(…).

두 영화 모두 폐쇄된 집단 내부의 권력 다툼에 대한 영화입니다. 무슨 정치 권력 다툼이라도 다뤘을 것 같지만 기껏해야 중학교 교실에서의 갈굼과 왕따, 시골 마을의 갈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권력을 움켜쥔 이들과 그에 반발하는 주인공,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세 진영을 오가는 인물들도 있는데 이들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사이비’의 목사처럼요. 이들은 내면의 억압을 결국 파괴적으로 발산하거나, 반대로 지극히 평범하기도 합니다. 다만 조금 외면할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본 나치 전범 아이히만처럼요.

무슨 나치까지 들먹이냐고요? 워낙 말도 안 되게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김기춘, 정호성, 조윤선 같은 사람들도 좋은 부모고 동료이자 부하였겠죠. 하지만 무엇이 정말 옳은지보다 무엇이 권력에 부합할지만 고민했던 그들이 얼마나 소름 돋는 일을 저질렀는지 우린 목격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세 편을 보면서 그런 현실을 반추하게 됩니다.

저는 지난해 제가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배우 황정민(흑심 가득)이 못돼먹은 재벌 아들내미를 깨부수는 영화 ‘베테랑’을 보고 나서 더 우울해진 기억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런 일은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거든요. 그 괴리감이 오히려 더 괴로웠습니다.

그에 비하면 세 편의 애니메이션은 철저히 기대를 배신하고 지옥만을 보여주죠. 권선징악 따위 없고, 뒤틀린 사람들이 끝까지 타인을 학대하는 풍경을 보면서 괴롭지만, 그래도 스스로 묻게 됩니다. 저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저 촘촘히 짜여진 권력구도 안에서 나는 과연 누구를 물어뜯을 것인가.

‘어지간한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인 저로서는 분명히 답을 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망가진 나라에서, 결국 답은 우리가 얼마나 고민하고 행동하느냐에 달려있을 겁니다. 저만의 고민이 아니니까 100만, 200만명이 촛불을 들고 모인 것이겠죠. 다행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유주희기자 ginge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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