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병자(病者)로 불리던 독일에서 ‘시대를 앞서 가지 못하면 시대에 잡혀 먹힌다’고 역설하며 개혁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진보정당에서 산업4.0과 노동4.0을 외쳤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죠.”
서울경제신문이 1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가보지 않은 길, 한국판 노동4.0 대계(大計) 만들자’를 주제로 개최한 ‘서울경제 미래컨퍼런스 2019’ 주제 발표자로 나선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노동뿐 아니라 사회계약, 국가 시스템, 정부 정책 모두가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디지털화·자동화를 핵심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에 맞춰 사회 전반의 제도와 시스템을 손보는 방식으로 노동4.0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상에서 일자리를 얻는 플랫폼 노동이 부상하고 고용계약이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파편화되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노동시장 구조 변화를 맞을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특히 ‘인더스트리4.0’ 정책을 펴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하는 것을 물론, 노동4.0 정책으로 미래 노동시장까지 선도하는 독일의 사례에 주목했다.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과 개혁을 추진하는 독일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점에서다. 그는 “독일에서 추진하는 인더스트리4.0과 노동4.0 정책은 우리나라로 치면 기획재정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육부 등이 함께 만든다”면서 “우리 교육부가 이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기술 진보에 따른 직무 변화에 노동자들이 대응할 수 있도록 직업훈련 등을 강화하고 있다. 변화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이 도태되지 않고 새로 익힌 기술로 취업시장에 다시 진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4차 산업혁명과 고령화 시대 노동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범부처 차원에서 ‘노동4.0 백서’를 발간하는 등 사회적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김 교수는 ‘어젠다2010’, 이른바 하르츠 개혁으로 독일 노동시장에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던 슈뢰더 전 총리를 “이념보다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며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의 각성도 촉구했다. 객관적 성과보다 대중의 주관적 평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정치의 숙명을 극복해 노동개혁의 길을 터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7년 5월 취임 이후 강력한 노동개혁을 통해 저성장 고리를 끊어내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추진하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경우 디지털에 관심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경제민주화뿐”이라면서 국민의 인식 수준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어떤 주체보다 노동4.0의 핵심이 돼야 할 노동계를 향해서는 “깨어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해 기회로 만들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득권 노조가 매몰돼 있는 과거 전투적 방식의 노동운동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전투적 노동운동이 합리화된 나라”라면서 “대기업 노조 조직률이 72%에 달하는 반면 30인 미만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0%대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지금 우리나라 노조의 노동운동은 기득권을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이익집단의 힘을 키우게 만들었고 노동의 정치를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사회적 약자로 보기 어려운 이익집단인 민주노총·한국노총 양대 노조의 힘을 키워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김 교수는 미국 자동차노조위원장 출신의 노동운동가인 월터 루서의 발언을 인용하며 “노동운동은 노동의 파이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나라의 파이를 위한 투쟁”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우리나라 민주노총은 언제적 얘기를 하고 있느냐”면서 “유럽 노총연구소에 따르면 노조가 디지털 경제를 적극 수용하지 못하면 노동시장을 양극화시킬 뿐”이라고 촉구했다./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