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인명 피해 현장에서 마주한 끔찍한 장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요. 끝난 뒤에도 그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꿈속에서 되풀이되는 경우도 있어요.” (광주의 한 소방관)
이태원 참사 현장에 지원을 나간 소방관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소방관 정신건강 관리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대형 산불과 재난 등 참혹한 현장을 자주 접하는 직업의 특성상 심리적 위기에 취약한 소방관들을 위해 퇴직 소방관을 활용하는 등 상담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1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소방청의 ‘마음건강 상담·검사·진료비 지원’ 사업은 2023년과 지난해에 이어 올해 예산도 5억 6000만 원으로 변동이 없었다. 이 사업은 소방청이 의료기관에서 정신 치료를 받은 소방공무원에게 치료 비용을 전액 지원해주는 사업이다. 또 다른 정신건강 사업인 ‘스트레스 회복력 강화 프로그램’도 6억 9000만 원으로 3년째 동일했다.
전문 심리상담사가 전국의 각 소방서와 119안전센터 등 소방 기관을 직접 방문해 맞춤형 상담을 제공하는 ‘찾아가는 상담실’ 사업의 올해 예산은 약 30억 원으로 지난해(24억 원)보다 유일하게 늘었다. 문제는 ‘찾아가는 상담실’에서도 상담사 1명당 맡은 소방공무원은 약 300~500명을 오가는 등 체계적인 전담 관리가 어려운 구조라는 점이다. 한 ‘찾아가는 상담소’의 관계자는 “군인·경찰에 비해 소방의 정신건강 지원책이 가장 취약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소방청은 ‘2024년 자체 평가 결과 보고서’를 통해 ‘소방공무원 심신 건강 증진 및 보건 안전 지원 강화 사업’을 5등급(다소 미흡)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 발생 당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 대변인을 맡았던 김동욱 소방관은 “20년이 넘는 경력을 지닌 고참이었는데도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힘이 들었다”면서 “‘찾아가는 상담실’의 심리상담사가 1년에 한두 번 오기 때문에 낯설어 소방관들과 교감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20일 인천소방본부 소속 A(30) 씨가 실종 10일 만에 숨진 채로 발견되면서 소방공무원의 정신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정교하게 재설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A 씨는 이태원 참사 당시 출동 지원을 나간 뒤 소방청이 제공하는 ‘이태원 사고 관련 긴급 심리 지원’ 프로그램에 아홉 차례 참가하는 등 우울증을 앓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A 씨 외에도 고성소방서 소속 40대 소방장이 지난달 29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등 이태원 참사의 여파는 지속되고 있다.
소방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사건의 여파를 겪는 경찰들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재난과 범죄의 최전선에서 경찰관과 소방관들은 참혹한 현장에서 수많은 상처를 감내하고 있다. 그로 인한 PTSD와 우울증은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엄연한 직업병이자 산업재해”라며 재난 현장 출동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정신건강 관리 시스템 구축을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퇴직 소방관을 상담사로 활용해 직무 관련성을 높이는 등 정신건강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형아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는 “미국에서는 전문성을 유지하고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달할 수 있도록 은퇴한 인력을 활용한다”면서 “심리·의료 단체와의 협의체 구성을 통해 은퇴한 소방관의 재교육을 추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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