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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연희동 사저 주변 뒤숭숭한 분위기…폴리스라인 설치·경찰 대기
사회 사회일반 2021.11.23 14:25:00전두환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고인의 연희동 사저 주변은 뒤숭숭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23일 관계자들에 따르면 사저 내부에는 이순자 여사와 장남 전재국 씨, 차남 전재용 씨가 병원 이송을 앞둔 고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 절차를 밟느라 시신을 아직 병원으로 이송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취재진도 사저 주변에서 북적였다. 방역절차와 치안 관리 문제로 경찰과 보건당국 관계자들 또한 사저 주변을 드나들었다. 전 전 대통령의 시신은 유전자증폭(PCR) 검사에서 코로나19 음성 결과가 나오면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안치된다. 생전 전씨와 인연이 깊은 인사들은 이날 황급히 사저를 찾아 애도를 표했다. 고명승 전 3군사령관은 사저 앞에서 취재진을 만나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다. 무슨 할 말이 있겠나"라며 "한 어른이 세상을 떠나셨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그냥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는 전 전 대통령의 유언을 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 오일랑 전 청와대 경호실 안전처장, 사자명예훼손 재판의 법률대리인 정주교 변호사 등도 사저를 방문했다. 사저 주변에는 경찰 차량 여러 대가 주차돼 있었다. 폴리스라인이 설치되는 등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경찰 과학수사대(CSI) 직원들이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한 70대 남성은 전씨가 5·18 유혈진압과 무관하다는 내용의 전단을 민 전 비서관에게 전달하려다 경찰에 제지당하기도 했다. 전씨의 빈소가 마련될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주변도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전하기 위해 취재진 수십 명이 몰려 있다. -
전두환 측근, 5·18 묻자 "막연히 사죄해라? 옛날 원님인가"
사회 사회일반 2021.11.23 14:21:19전두환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이 취재진으로부터 5·18 관련 질문을 받자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23일 전씨가 사망 하기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남긴 말이 없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형사소송법에도 죄를 물으려면 시간 장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해서 물으라고 돼 있다"며 "그냥 막연하게 사죄하라는 건 옛날 원님이 사람 붙잡아 놓고 '네 죄를 네가 알 터이니 이실직고하라'는 것 아닌가"라고 반발했다. 민 전 비서관은 "육하원칙에 따라 그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서 어떤 부대를 어떻게 지휘했고 누구에게 어떻게 집단 발포 명령을 했는지, 그것을 적시한 다음 사실이냐 아니냐 묻고 거기에 대해서 사죄하라고 그래야지 무조건 사죄하라고 그러면 그게 질문이 되느냐"며 취재진에 따져 물었다. 이어 "광주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그런(사죄) 말씀은 이미 하신 바가 있다"며 "백담사 계실 때도 그렇고 여기 연희동에 돌아오신 뒤로도, 사찰에 가서도 기도와 백일기도 하시고 여러 차례 했는데 더 어떻게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민 전 비서관은 "발포 명령이라는 건 없었고 보안사령관이 발포 명령을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면서 "(전씨가)사죄의 뜻을 밝힌 건 대통령이 된 후 광주 사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충분히 못 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유감스럽다는 말을 한 것이지 발포 명령했다고 사죄하는 게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
전두환·노태우의 기구한 운명…盧 별세 28일 만에 본인도 떠나[전두환 사망]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1.23 14:07:00군사 반란(쿠데타)로 집권한 정부의 1인 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제11대)이 사망했다. 함께 쿠테타를 도모한 노태우 전 대통령(제12대)이 떠난 지 28일 만이다. 두 사람은 60여 년 간 질긴 인연은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지 한 달도 안돼 전 전 대통령도 떠나면서 막을 내렸다. 지난달 26일 노 전 대통령의 부고를 들은 전 전 대통령은 침묵 속에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건강 문제로 빈소를 찾아 조문하지 못했다. 대신 부인 이순자 여사가 대신 조문했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고교 때부터다. 전 전 대통령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대구에 정착해 같은 해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한 살 어린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1951년 경북고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52년 육사 제11기(정규 육사 1기) 동기생으로 다시 만난다. 생도 시절 전씨는 축구부에서, 노 전 대통령은 럭비부에서 활동했다. 전 전 대통령은 전 대통령이 1959년 김옥숙 여사와 결혼할 때 사회를 봐줄 정도로 노 전 대통령과 돈독한 사이였다. 전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을 지냈고, 이 자리를 노 전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전 대통령이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으로 12·12 쿠데타를 주도해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이 맡고 있던 9사단 병력을 중앙청으로 출동시켜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전 전 대통령은 쿠테타를 일으킨 뒤 1981년 2월 5,277명의 선거인단이 참여하는 이른바 ‘운동장 투표’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전 전 대통령은 취임 후 노 전 대통령에게 군을 떠나 전두환 정권에 합류하자고 권했다. 노 전 대통령이 이를 따랐다. 이후 그는 노 전 대통령을 무한 신임하며 그를 13대 대통령으로 사실상 이끌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그가 철권을 내려놓을 때도 노 전 대통령을 ‘정치적 후계자’로 지명해 2인자에게 권력의 바통을 넘겨준 셈이다. 하지만 민주화 바람으로 탄생한 정권을 받은 노 전 대통령의 길은 달랐다. 그는 취임 이후 ‘5공 청산’이라는 거센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요구가 빗발쳤다. 노 전 대통령은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 있으라고 권고했다. 전 전 대통령은 결국 백담사에 유배되는 길을 택했다. 전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떠나기 전날인 1988년 11월 22일 밤 노 전 대통령에게 전화로 백담사 은둔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전임자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해 부끄럽다. 잠시 고생스럽더라도 참고 견디면 조속한 시일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하겠다”고 달랬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역사의 심판은 피할 수는 없었다. 김영삼 정부가 탄생하자 두 사람은 12·12 쿠데타와 비자금 사건 등으로 1995년 11월 16일과 같은 해 12월 3일 나란히 구속돼 법의 심판을 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후 12월 당시 임기 말이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두 사람은 나란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다만 두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으며 사이가 온전하기 못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먼저 검찰 소환에 응해 구속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라면서 강한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들(5공 측 인사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면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라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그런 인식 차이로 인해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둘의 만남은 2014년 8월13일이 마지막이었다. 전씨는 갑자기 노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해 김옥숙 여사에게 “노 전 대통령을 좀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전씨는 병상에 누워있는 노 전 대통령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라고 했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노 전 대통령은 김 여사가 “알아보시면 눈을 깜빡여보시라”고 하자 눈을 깜빡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은 올해 10월 26일 떠났다. 28일 뒤인 이날 전 전 대통령도 사망했다. 신군부를 낳은 두 명의 권력자가 한 달 사이에 나란히 세상을 등진 셈이다. -
"왜 나만 갖고 그래" "전재산 29만원" 논란의 어록들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1.23 12:48:5023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군부 출신으로 논란을 일으킨 어록도 많다. 그는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후인 2003년에도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해 공분을 샀다. 1997년 법원이 뇌물 수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2,205억 원의 추징금 납부를 명령하자 “예금자산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씨의 발언도 전 전 대통령 못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2017년 당신은 외롭지 않다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전두환의 쿠데타는 사심이 없는 쿠데타였다”, “우리 부부도 5·18 사태의 희생자다”라고 주장했다. 생전 고인이 남긴 주요 발언들 △ "김종필은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이는 아직 어리고 능력이 부족하고, 김대중이는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1980.1. 대통령 당선 전) △ "자기 자식도 제대로 교육 못 시킨 교직원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공교육이 우선이다. 사교육이 흥하는 순간 제대로 된 인재를 기대하기 힘들다"(대통령 재임 중 교육계를 향해) △“나도 인간인데 동네북처럼 두들기지 마라. 노태우가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나를 도청하다니 내가 빨갱이냐”(1988년. 대통령 퇴임 후 백담사로 가기 전) △ "밖에서는 재임기간 나쁜 짓만 한 사람이라고 저를 욕하고 있는데, 사람이 실수라도 잘한 일 하나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소가 뒷걸음 치다가 쥐 잡는 식으로 말입니다" (1988. 백담사 시절 찾아온 불교 신도들에게)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내가 돈을 받지 않으니 기업인들이 되레 불안을 느꼈다. 기업인들은 내게 정치자금을 냄으로써 정치 안정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1996년 2월 26일 비자금 사건 첫 공판에서)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1996년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 직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심판하고 있으나 현실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96년 8월 5일 비자금 뇌물 수수, 12·12 사태 및 5·18 사건으로 10개 죄목으로 기소된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사형‘ 구형 후) △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 (1995. 내란혐의 재판 과정에서) △ "예금 자산이 29만원밖에 없다"(1997. 추징금 2,205억 원 중 532억 원을 납부한 뒤) △ "나 자신의 인권도 탄압받고 짓밟히면서 살아왔다. 내가 인내심이 있고 성질이 좋아 이렇게 살아 있지, 다른 사람이라면 속병이 나서 제풀에 죽었을 것이다"(1999.1.13. 자택을 방문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대통령 퇴임 후의 마음고생을 토로하며) △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정치를 해야지.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거짓말하고 그러면 안 되지" (2000.3.10 김대중 정권에게)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2003년 2월 KBS 인터뷰)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2014년 8월 9일, 병상에 누워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연희동 자택에서) △『전두환 회고록』 서문에서 전 전 대통령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도, 12·12와 5·17이 내 사적인 권력 추구의 출발점이라고 단정되고 있겠지만,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낸 것은 시대적 상황이었다(2017.4. '전두환 회고록' 서문에서) △ "내가 광주에 내려갔다면 작전 지휘를 받아야 했을 현지 지휘관들만큼은 나를 만났거나 봤어야 했는데 그런 증언을 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2017.4. '전두환 회고록'에서) △ "조비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2017.4. '전두환 회고록'에서) △ "이거 왜 이래" (2019.3.11. 故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 출석하며 '발포 명령을 부인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 "광주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 있어? 광주 학살에 대해 나는 모른다" (2019.11.7 강원도 홍천의 한 골프장에서 임한솔 당시 정의당 부대표가 5·18에 대한 책임을 묻자) △ "(추징금은) 네가 대신 좀 내주라" (2019.11.7 강원도 홍천의 한 골프장에서 임한솔 당시 정의당 부대표가 추징금을 언제 낼 거냐고 묻자) -
국립묘지 안장, DJ는 되고 전두환은 안되는 이유 [전두환 사망]
사회 사회일반 2021.11.23 12:33:11정부는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23일 기자단에 공지를 통해 "전 전 대통령은 내란죄 등으로 이미 실형을 받았기 때문에 국립묘지법상 국립묘지 안장 배제 대상"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국립묘지법 제5조 4항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79조 제1항 제2호 등에 해당하는 죄로 실형을 받은 경우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 전 대통령은 보안사령관직을 맡았던 지난 1979년 이른바 ‘12·12사태’로 불리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이와 관련해 1997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내란죄 등의 혐의를 안정 받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당시 집권했던 김영삼(YS)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대중(DJ) 대통령 당선자와 합의해 전 전 대통령에 대해 1997년 12월 특별사면을 결정했다. 전 전 대통령이 내란죄 등에 대해 특별사면을 받았지만 국립묘지 안장 대상은 아니라는 게 보훈처의 입장이다. 보훈처는 앞서 지난 2019년 1월 내란죄 등의 형이 확정 된 뒤 사면·복권을 받은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지 물은 천정배 민주평화당 의원의 질의에 대해 사면·복권된 경우에도 국립묘지 안장 대상 결격 사유는 해소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법무부 역시 같은 의견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같은 보훈처와 법무부의 유권 해석에도 불구하고 쟁점은 남게 될 전망이다. 앞서 2009년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에 당선 되기 전인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뒤 1987년 사면 받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는 이명박(MB) 정부 시절이었는데 당시 법무부는 사면·복권시 국립묘지 안장 자격도 회복시켜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김 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데 따른 것이고, 전 전 대통령의 내란죄 유죄는 군사 쿠데타에 따른 것이어서 국민의 법감정이나 역사적 맥락에 미뤄볼 때 동급으로 취급 받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법리적 측면만 따져본다면 사면 복권된 전직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정 여부를 놓고 정부 기관이 상반된 유권해석을 내렸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립묘지 안장 여부는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의 김 전 대통령의 안장 결정과 문재인 정부의 전 전 대통령의 안장 배제는 모두 ‘민주화’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공유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를 실행하는 모습이 자칫 어느 진영을 포용하느냐, 배제하느냐의 이분법적 의미로 곡해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쟁점을 안고 있는 인물의 국립묘지 안장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정부의 보다 세심하고 정교한 여론 소통 과정과 행정적 절차가 뒷받침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립묘지 안장은 국가에 공헌한 분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정권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는 통치행위의 산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尹 "전두환, 전직 대통령이니 조문가야…정치적 얘기 시의적절치 않아"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1.23 12:17:32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에 조문할 뜻을 밝혔다. 윤 후보는 이날 오전 여의도 한 식당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언제 갈지는 모르겠지만, 전직 대통령이시니까 (조문을) 가야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족에게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삼가 조의 표한다”며 “유족에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한 말씀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돌아가셨고 상중이니까 정치적인 얘기를 그분하고 관련지어서 얘기하는 건 시의적절하지 않은 거 같다”고 선을 그었다. 이날 국민의힘에서는 김기현 원내대표가 당 지도부의 조문 계획을 묻는 질문에 “다른 분 의견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면서도 “개인적으로 조문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적 비난을 받았던 엄청난 사건의 주역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막중하다”면서 “다만 인간적으로는 돌아가신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全유언 “북녁 땅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화장한 뒤 안장 예정 [전두환 사망]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1.23 11:54:14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치러질 전망이다. 또 전 전 대통령을 화장한 뒤 북녁이 보이는 고지를 찾아 안장할 예정이다.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전 전 대통령이 유언으로 “평소에 나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고 했다”며 가족들이 유언에 따르기로 했다고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전두환 회고록 3권을 인용하며 “유언은 북녘 땅이 내려다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대목은 “건강한 눈으로 맑은 정신으로 통일 이룬 빛나는 조국 모습 보고 싶다. 그전에 내 생 끝난다면 북녘 보이는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서 그 날을 (보고 싶다)”라고 전했다. 다만 전 전 대통령을 안장할 전방 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일단은 화장한 후에 연희동에 그냥 모시다가 장지가 결정되거나 하면 그때 (옮길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은 5.18 피해자와 유족에 대해서는 별다른 유언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 전 비서관은 ‘전 전 대통령이 5.18 피해자들에게 이야기를 남겼느냐’는 질문을 받고 전 전 대통령이 그간 5.18 피해자와 유족에게 여러 차례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고만 했다. 그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전 대통령이 바로 오는 11월 23일이 33년 전에 백담사 가던 날인데 그날 여기에서도 성명에서 발표하고 피해자들한테 여러 가지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 광주 청문회 때도 다 말씀했고 여러 차례 그런 말씀 했다”며 “백담사 있을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100일 기도 같은 거 하면서 광주 당시 피해자나 유가족에 대한 여러 가지 위로의 말씀 같은 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했다”고 말했다. -
[속보]전두환 사망, 明 "빈소 방문 생각 없어…끝까지 범죄 인정 안 해 아쉬워"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1.23 10:40:37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에 대해 “용서 받지 못할 범죄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 후보는 이날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디지털 대전환’ 공약을 발표한 뒤 기자들과 만나 “전 전 대통령은 이 중대범죄행위에 대해 인정하지도 않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전 전대통령은 명백하게 확인된 내란 학살 주범”이라며 “최소 수백 명의 사람을 살상했던,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국가 권력을 찬탈했던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사과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후보는 “(반성하지 않아서) 참으로 아쉽게 생각한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미완 상태인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이 드러날 수 있도록 당시 사건 관련자들의 양심 선언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 후보는 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조문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현재 상태로서는 조문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지난달 27일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
끝내 사과하지 않은 전두환 사망…"전방고지 백골로"
사회 사회일반 2021.11.23 09:49:37전두환 전 대통령이 오늘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90세. 그는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됐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해 퇴임 후 사형을 구형 받았다. 그해 8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1대 대통령이 된 전 전 대통령은 1981년 7년 단임 대통령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통과시킨 후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오르며 제5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7년 임기 동안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을 바탕으로 고도의 경제 성장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임기 말, 1987년 터진 박종철 고문치사 이후 직선제를 요구하는 이른바 6월항쟁이 시작됐다.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1988년 임기를 마친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구속기소됐고, 반란수괴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을,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이듬해 복권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군사 쿠데타와 5·18 유혈 진압을 비롯한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33년전 전인 88년 11월 23일 전 전 대통령은 연희동 자택에서 재임기간 중의 실책과 잘못 및 비리에 대해 사죄하고 부인 이순자 씨와 백담사로 향했다. 공교롭게 백담사에 갔던 날 전 전 대통령은 사망했다. 한편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언은 자신의 회고록에 담긴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그냥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는 내용으로 전해졌다.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씨 자택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밝히면서 "전방고지라는 게 장지인데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장지가 결정될 때까지는 일단은 화장한 후에 연희동에 그냥 모시다가 결정되면 그리로 하실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내용은 전씨가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 3권에 담겨있다. 민 전 비서관은 "유언은 그동안에 쭉 하던 말씀이 있고 돌아가신 후의 일에 관해서는 이미 회고록에 유서를 남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삼남 가족이 미국에 체류 중인데 오늘 갑자기 돌아가셨으니까 연락을 받고 올 텐데 시간이 걸리지 않겠냐"며 "3남 가족들이 모인 후에 장례를 치러야 해서 삼일장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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