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IT 기술 혁명으로 함축되는 현대를 '실리콘 시대'라 칭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제 컴퓨터, 즉 0과 1만 잘 사용해도 된다고 여긴다.
힘줘 말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소재는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중요해졌다. 현재 전 세계 연구실에서는 미래에 우리 삶을 바꿔놓을 신소재를 열심히 연구 중이다. 온갖 유해물질들을 격퇴할 코팅 소재, 필요에 따라 온도나 산성도(pH) 등을 스스로 변화시키는 자가 조절 소재 등 종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공학자들이 이들의 진가를 증명해 제품에 적용되면 우주복에서 핵원자로에 이르는 모든 것의 성능이 개선된다. 실리콘 시대의 핵심 교리라 할 수 있는 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 처럼 반도체 칩에 들어가는 부품의 수도 매년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우수한 소재로 우수한 컴퓨터가 개발되면, 그 컴퓨터는 더 우수한 소재의 개발에 활용된다. 수백만 년 동안 발전해온 소재공학의 진정한 혁신은 지금부터다.
전자 피부
피부는 인체의 1차 보호막이자 감각 전달자다. 이 점에 착안해 과학자들은 피부처럼 부드럽고 촉촉하며 외부 자극의 인식이 가능한 전자제품 외피 소재를 찾고 있다.
이미 일리노이대학 연구팀은 손가락에 감을 수 있을 만큼 유연하고, 압력을 전기신호로 변환해주는 압전회로소자를 개발했다. 또 스탠포드대학 팀이 개발한 젤은 전기저장이 가능해 어떤 모양의 배터리도 만들 수 있으며, 카네기멜론대학 카멜 마지디 박사팀의 경우 전도성 액체금속이 흐르는 고무 소재 압력·마찰 감지센서를 연구 중이다. 마지디 박사는 전자피부 관련 기술은 궁극적으로 로봇이나 기계를 생명체처럼 변모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안전성 만점 원자로
전 세계에 가동 중인 약 440기의 원전들은 우라늄이 들어있는 원자로 압력용기를 포함, 주요 구성품의 소재로 스틸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스틸도 지속적 방사능에 노출되면 열화가 일어나 균열에 취약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와 로스알라모스국립연구소(LANL)공동연구팀이 개발한 '나노 라미네이트(Nano laminate)'복합소재를 이용하면 이 문제를 대폭 개선할 수 있다. 철판 사이에 충전하면 방사능을 흡수, 열화를 막고 원자로의 내구성을 높인다.
연구팀의 줄리아 그리어 박사는 가까운 미래에 나노 라미네이트 부품이 생산돼 노후 부품의 교체에 쓰일 것으로 본다. 이는 외계 행성 탐사선의 우주방사선 차폐재로도 훌륭한 소재다.
태양 추적 태양 전지
태양전지 패널을 태양의 위치에 맞춰 회전시키면 전력 생산량의 극대화가 가능하지만 이를 위한 기계장치의 작동에 적잖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에너지 소비 없이 이를 구현할 수는 없을까. 미국 위스콘신대학 홍루이 지앙 박사가 그런 장치를 개발했다. 햇빛을 흡수하는 탄소나노튜브와 열에 의해 수축하는 액정탄성중합체(LCE)를 접목, 태양전지 패널용 지지대를 만든 것.
태양이 패널의 좌측에 있어 지지대의 좌측을 가열하면 그 부위의 LCE가 수축하며 패널이 태양을 향해 기울어지는 원리다. 현장실험 결과, 이 시스템은 태양전지의 효율을 평균 10% 높였다.
무균 병원
매년 미국에서만 병원에서의 세균 감염에 의해 약 10만명이 숨진다. 때문에 병원 직원들은 끊임 없이 의료장비를 소독, 세균 전파를 막아야 한다.
하버드대학 연구팀이 개발한 코팅 소재를 쓰면 미생물이 들러붙지 못할 만큼 의료기기의 표면을 극도로 미끄럽게 만들 수 있다. 이 소재는 다공성 표면에 윤활액체를 주입하는 'SLIPs'기술에 기반한다. 금속, 테플론 등 특정 기기의 표면에 코팅하면 모세관 현상에 의해 표면의 미세한 구덩이 속으로 윤활유가 침투, 완벽한 보호막이 형성된다.
연구팀의 탁-싱 웡 박사는 SLIPs가 먼지, 얼음, 페인트의 표면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효용성이 매우 높다고 강조한다.
지능형 의류
사람들은 뜨거운 햇빛, 비, 추위를 피하기 위해 그때그때 다양한 의복을 입는다. 미국 피츠버그대학 안나 발라즈 박사팀은 하버드대학 팀과 함께 이런 귀찮음 없이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는 의류, 다시 말해 옷이 자신의 온도를 조절해 착용자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줄 소재를 개발 중이다.
섬유 내부에 삽입된 화학적·기계적 피드백 시스템을 통해 사전 설정된 온도에서 발열반응이 온·오프되는 메커니즘이다. 연구팀은 20년이면 실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방식을 변형해 산성도(pH), 빛, 포도당 수치 등에 반응하도록 하면 급수관, 창문, 의료기기 등을 한층 똑똑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난공불략 장갑차
소재공학자들은 종종 공학기술의 극한에 도전해야 한다. 이때 자연은 그들에게 유능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캐나다 맥길 대학의 프랑수아 바틀렛 박사는 바로 이 점에 착안, 물고기 비늘의 구조를 재현함으로써 합성소재의 강인성 향상 방안을 찾고 있다.
또한 빌라노바대학 팀은 소라고둥 껍질과 유사한 각도로 세라믹 결정을 적층시켜 고강도 세라믹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세라믹은 소라고둥처럼 균열이 지그재그로 이어지다가 사라져 깨지지 않는다. 강도가 기존 세라믹 대비 10배나 된다. 3~5년이면 이를 적용한 방탄장갑판이 개발될 수 있다.
무어의 법칙 마이크로칩의 밀도가 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이론. 고든 무어가 페어차일드반도체 연구원 시절 주창했다. 황의 법칙은 반도체 메모리의 용량이 1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이론으로 삼성전자 황창규 전(前) 사장이 주창했다.
열화 (deterioration, 劣化) 열, 빛, 방사선, 미생물 등에 의해 화학적 구조에 유해한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
모세관 현상 폭이 좁고 긴 관을 액체에 넣으면 관 속으로 액체가 올라오는 현상. 식물의 뿌리가 이 방식으로 무기양분과 수분을 흡수한다.
가황 (vulcanization) 생고무에 황(S)을 넣어 가열해 탄성에 변화를 주는 것. 현재는 플라스틱 등 단단한 소재에 탄성을 가하는 공법을 총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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