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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브랜드 이야기] 랑에 운트 죄네

독일 시계산업의 자존심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다

랑에 운트 죄네는 시계 브랜드 빅5에 꼽히는 유일한 비스위스 시계 브랜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한때 명맥이 끊기기도 했지만, 창업자의 3대손인 발터 랑에의 활약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랑에 운트 죄네는 메르세데스 벤츠와 함께 제조업 강국인 독일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오늘날 고급 시계 산업의 헤게모니는 주로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이 주도하고 있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여느 유럽권 국가에도 걸출한 시계 브랜드가 몇몇 있지만, 그 수나 영향력 면에서 스위스 시계 브랜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일본 역시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 같은 브랜드가 쿼츠 부문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으나 이들은 고급 시계 브랜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고급 시계 브랜드 중에서도 하이엔드급으로 눈높이를 올리면 차이는 더 벌어진다. 스위스 브랜드와 비 스위스 브랜드의 구분보다 ‘르로클 Le Locle 매뉴팩처냐 라쇼드퐁 La Chauxde-Fonds 매뉴팩처냐’처럼 스위스 내 어느 지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느냐 같은 구분이 훨씬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

독일 글라슈테 Glash″utte 지역에 기반을 둔 랑에 운트 죄네 A. Lange & S″ohne는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한 시계 브랜드다. 하이엔드 빅5에 이름을 올리는 유일한 비 스위스 시계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랑에 운트 죄네는 메르세데스 벤츠와 함께 제조업 강국인 독일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랑에 그 위대한 시작

1830년대 독일 동부 작센 Saxony 주에선 출중한 워치메이커 한 명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작센의 주도인 드레스덴 Dresden에서 도제식 시계 공방을 운영하며 주로 장식용 괘종 시계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구트케스 Johan Christian Friedrich Gutkaes(1785~1845)였다.

1841년 그는 그 유명한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하우스의 벽시계 제작을 의뢰받아 화제가 됐다. 그는 젬퍼 오페라 하우스의 벽시계를 굉장히 독특하게 설계했다. 당시 일반적이던 아날로그 디스플레이 방식 대신 생소한 점핑 플레이트 디지털 방식을 적용했고, 또 시간과 분 표시도 각각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로 제작해 독특한 매력을 더했다. 그는 이듬해 젬퍼 오페라하우스 벽시계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작센 궁정의 워치메이커로 임명되기도 했다.

젬퍼 오페라 하우스 벽시계 제작으로 유명인사가 된 또 다른 인물도 있었다. 프리드리히 구트케스의 조수이자 제자였던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 Ferdinand Adolph Lange(1815~1875)였다. 프리드리히 구트케스가 아돌프 랑에를 젬퍼 오페라 하우스의 공동 작업자로 대등하게 이름을 올리면서 아돌프 랑에는 ‘프리드리히 구트케스가 인정한 워치메이커’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아돌프 랑에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첫 번째 사건이었다.

랑에 운트 시에 오픈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는 1815년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아돌프 랑에는 비상한 손재주로 주변을 놀라게 하곤 했는데, 이런 그의 재능을 알아본 프리드리히 구트케스는 아돌프 랑에가 16세가 되던 1830년에 그를 제자로 거둬들여 워치메이커의 길을 걷게 했다.

1837년 스승으로부터 장인 칭호를 부여받은 아돌프 랑에는 세계 유수의 시계 공예와 기술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독일 최고의 워치메이커로 성장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1841년 스승의 요청으로 젬퍼 오페라 하우스 벽시계 제작에 참여한 후 유명인사가 된 그는 1845년 12월 7일 마침내 그토록 염원했던 자신만의 시계 공방 랑에 운트 시에 Lange & Cie.를 열었다.

글라슈테를 시계의 성지로

랑에 운트 시에는 작센주에서 비교적 외곽인 글라슈테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이야 독일 시계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글라슈테이지만, 당시만 해도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던 광산업이 쇠락하면서 지역 경제가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폐광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주민들은 도시를 떠나거나 부랑자로 전락했다.

아돌프 랑에는 이곳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그는 글라슈테 지역에 시계 산업이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새로운 소득원을 마련해주었다. 주민들은 생활의 안정을 되찾게 해준 아돌프 랑에를 적극 지지해 1848년 시장선거에서 그를 후보자로 추대했고 또 당선시켰다.

아돌프 랑에는 33세였던 1848년부터 51세가 되던 1866년까지 무려 18년간이나 장기집권했다. 그는 이 기간에 글라슈테를 낙후된 광산도시에서 현대적인 공업도시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글라슈테는 아돌프 랑에 사후 20년인 1895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A. J. 랑에 A. J. Lange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전설이라 불리는 이유

아돌프 랑에는 시계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미터법과 글라슈테 선반을 워치메이킹 작업에 도입해 시계 제작 공정의 효율화와 정확도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또 1864년 스리쿼터 플레이트를 개발함으로써 무브먼트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68년 랑에 운트 시에는 현재의 이름인 랑에 운트 죄네로 사명을 변경한다. 아돌프 랑에의 두 아들인 리처드 랑에 Richard Lange(1845~1932)와 프리드리히 에밀 랑에 Friedrich Emil Lange(1849~1922)가 랑에 운트 시에 경영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랑에 운트 죄네를 우리말로 옮기면 ‘랑에와 아들’이라는 뜻이다.

첫째인 리처드 랑에는 워치메이커라기보단 과학자에 더 가까웠다. 그가 출원한 시계 관련 핵심 특허만 27개에 달했다. 그는 종종 200년 전의 인물인 크리스티안 호이헨스 ChristiaanHuygens(1629~1695)에 비견되곤 했다. 호이헨스가 헤어스프링을 개발해 시계사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면 리처드 랑에는베릴륨 Beryllium 금속을 만들어 시계사에 큰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현재 하이엔드급 시계의 밸런스 스프링 대부분이 베릴륨 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베릴륨은 기능적으로 탁월한 금속이다.

둘째인 에밀 랑에는 금속 세공과 컴플리케이션 기능 활용에 탁월한 워치메이커였다. 그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계를 만드는 장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제작한 시계들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은 찬사는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그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랑에 운트 죄네의 전설로 통하는 센테니얼 투르비용 Centennial Tourbillon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그는 센테니얼 투르비용 덕분에 1902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Legion d’Honneur를 수훈했다.

1, 2차 세계대전의 여파

리처드, 에밀을 거쳐 3대인 오토 랑에 Otto Lange (1878~1971)에 이르기까지 랑에 운트 죄네의 명성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시계 주문 후 수령에 이르기까지 수년이 걸렸음에도 세계의 황족과 왕족, 귀족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어제 만들어 오늘 출고하면 내일은 문화유산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랑에 운트 죄네 시계의 명성은 대단했다.

대를 잇는 시계 브랜드로서 3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오너 리스크도 겪지 않았던 브랜드는 랑에 운트 죄네가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랑에 운트 죄네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이 위기는 의외의 곳에서 시작됐다. 바로 1,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1, 2차 세계대전은 랑에 운트 죄네가 사실상 폐업하게 된 계기가 됐다. 거의 모든 쇠붙이가 군수 장비 제작에 사용되면서 시계 재료도 구하기가 어려웠고, 장인들은 무기 제조 기술자로 축출돼 매뉴팩처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날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매뉴팩처가 통째로 날아가는 최악의 상황을 맞기도 했다.

발터 랑에, 다시 글라슈테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동독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공산화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공산당이 장악한 동독 정부는 모든 산업체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아돌프 랑에의 증손자인 발터 랑에Walter Lange(1924~)는 글라슈테가 위치한 동독에서 더 이상 시계 사업을 영위할 수 없게 됐음을 확인하곤 지체 없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후 동서로 나뉜 독일이 1990년 10월 통일되기까지 랑에 운트 죄네의 명맥은 40년 넘게 끊기게 된다.

독일이 통일된 직후인 1990년 12월, 발터 랑에는 서독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글라슈테를 찾았다. 그가 그토록 학수고대해왔던 랑에 운트 죄네 재건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증조부인 아돌프 랑에가 랑에 운트 시에를 설립한 지 145년만의 일이었다.
발터 랑에는 그의 증조부가 그랬던 것처럼 글라슈테의 주민들을 빠르게 결집해나갔다. 그는 글라슈테 주민들에게 세계대전 이전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시계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글라슈테는 열광했다.

1994년, 새로운 전설의 시작

그리고 마침내 1994년 10월 24일. 발터 랑에는 랑에 운트 죄네의 정신적 고향이나 다름없는 작센주 드레스덴 궁에서 새로운 모델을 들고 언론 앞에 나섰다. 이날 그가 내놓은 랑에원 Lange 1, 삭소니아 Saxonia, 투르비용 “푸르 르 메리테”Tourbillon “Pour le M'erite”, 아르카데 Arkade는 랑에 운트 죄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선언문과도 같았다.

1990년 랑에 운트 죄네의 상호가 부활했을 때, 언론으로부터 받은 관심은 대단했다. 하지만 새로 나올 시계들에 대한 기대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 4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너무나 큰 공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랑에 운트 죄네는 랑에 운트 죄네였다. 당시 수많은 우려와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랑에 운트죄네의 새로운 4개 모델은 상당한 기술력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순식간에 세계 시계 마니아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과거를 뛰어넘은 현재

이후에도 ‘시간의 공백’은 랑에 운트 죄네와는 전혀 무관한 말이었다. 1997년 제로 리셋 메커니즘 특허에 이어 2003년 자체 밸런스 스프링의 개발, 2005년 스톱 세컨드 기능을 탑재한 투르비용 출시 및 2007년 콘스탄트 포스 이스케이프먼트의 개발, 2009년 회전 디지털 방식으로 시와 분을 표현하는 대담함을 선보인 자이트베르크 Zeitwert(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하우스의 벽시계에서 착안했다) 및 2013년 7개 컴플리케이션 기능을 갖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Grand Complication 출시에 이르기까지 랑에 운트 죄네가 내놓은 결과물들은 면면이 다 화려했다.

올해는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가 랑에 운트 시에를 창업한지 170년이 되는 해이자 발터 랑에가 랑에 운트 죄네 제2의 창업을 한 지 25년이 되는 해이다. 랑에 운트 죄네의 재기를 두고누군가는 ‘독일 제조업의 승리’라고도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글라슈테 주민들의 결집이 만든 기적’이라고도 한다. 일각에서는 ‘현재 랑에 운트 죄네의 명성이 이미 1890년대를 뛰어넘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전설의 시계 브랜드 랑에 운트 죄네, 그 비상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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