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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내린 KB사태-다시보는 한국금융] <3> 대통령만 바라보는 금융인들

정권 바뀌면 코드 맞춘 '떼거리 영업'… 금융산업 퇴행 부채질

정부 기술금융 강조에 은행들 무리한 대출 확대

자율성 없이 실적 경쟁… '주기적 부실 리스크' 우려

통일금융·관계형 금융도 실체없이 겉돌긴 마찬가지

신제윤(왼쪽)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16일 열린 ''금융혁신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신 위원장은 당시 "은행별 기술금융실적을 점검하는 ''기술금융 종합상황판''을 10월부터 가동하겠다"고 했지만 금융계에서는 줄을 세우는 행태라는 비판이 나왔다.
/서울경제 DB


여신 심사만 수십 년을 담당한 시중은행의 임원 A씨는 요즘 다른 임원들과 매일 설전을 벌인다. 정부로부터 기술금융 실적 압박을 받는 영업 쪽 임원들이 벤처 등으로까지 여신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하고 있지만 A씨가 보기에는 지금의 경기 상황이 너무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의 대출을 풀어서라도 경기에 '거품'을 내보겠다는 무리한 부양 정책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이 거품이 꺼졌을 때 은행이 감당해야 할 부실이 떠올라 숨이 막힌다. A씨는 "은행은 지금 오히려 2~3년 후 경기를 내다보고 리스크 관리에 철저해야 할 시점인데 정부 방침에 휩쓸려 무리한 여신 확대가 시도되고 있다"며 "그간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거품 경제의 부작용을 떠올려 보면 막막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정권의 코드에 맞춰 금융회사를 동원하는 '떼거리 금융' 문화는 국내 금융산업을 퇴행시키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다. 이 정부 들어서도 '기술금융' '통일금융' 등의 미사여구로 포장된 정부의 금융정책에 줄 맞춰 금융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실적 경쟁에 내몰리고 실적이 미진한 금융회사에는 망신을 주는 후진적 관치금융이 다시 도지고 있다. 심지어 한국은행조차 '코드 금리' 논란에 휘둘린다.

은행권에서는 당장 기술금융 등의 만기가 돌아올 내년 말부터 본격적인 부실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당장 중견 기업계의 모범사례로 정부로부터 온갖 지원을 받았던 모뉴엘이 사기대출을 일으키고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해 은행권에는 커다란 충격으로 돌아온 상태다.

현 정부 핵심 정책인 기술금융은 은행의 보신주의 관행을 깨고 대출 받을 수 있는 기업의 외연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방식이 너무 고압적이고 자율성이 무시된다는 것은 문제다.

당장 은행권의 기업대출 영업방식에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통상 기업대출이 나갈 때는 2~3일이면 됐는데 최근에는 기술신용평가기관(TCB)으로부터 발급 받은 기술평가서를 활용하는 것이 실적의 기준이 되면서 20일 정도까지 늘어났다. 시중은행의 한 여신담당 임원은 "TCB 기술평가서를 받으라고 하기 전에 한국기업데이터·나이스 등과 같은 곳이 은행 요청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지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들이 은행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절차가 지연된다는 점은 기업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은행 임원 역시 "당국이 실적을 날마다 점검하고 월별로 망신을 주다 보니 은행 중에서는 TCB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데도 TCB로 받으라고 유도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 국회가 제출받은 기업은행의 기술금융 대출 실적을 보면 지난 8월 말 현재 592개 업체에 4,404억원을 빌려줬는데 이 중 기술력이 낮은 기술등급 T6 이하 기업이 39%에 달했다. 최고 등급인 T1(우수)을 받은 기업은 없었고 T2(우수)는 7개(1.1%)에 그쳤다. 기술력보다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대출을 진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안 나올 수 없다.



기술금융의 수혜 대상이 제한적이라 기업을 살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중은행의 한 지점장은 "정말 경기가 안 좋은 도소매업·숙박업 등의 유형들은 지원대상이 아니고 제조업이나 신기술로만 대상이 제한돼 있어 수혜 대상 자체가 적다"며 "기술금융 혜택을 볼 수 있는 지역도 외곽이나 공단 지역에만 편중돼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기술신용평가 수수료가 100만원에 달한다는 점도 은행들 입장에서는 골칫거리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은행 이자 수익률이 1% 남짓인데 3억원 대출해서 300만원 중 100만원을 TCB에 떼주면 200만원밖에 안 남는다"며 "이런 구조로는 기술금융이 정착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시중은행의 한 지점장은 "예전에도 기술금융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 나름 괜찮은 기업이면 은행들이 알아서 대출을 내줬지만 실제 그런 기업들이 성공한 확률이 10~20% 수준이었다"며 "당장 부작용은 안 나타나겠지만 1~2년 있으면 부실이 날 수 있고 책임은 은행이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통일 금융' 역시 실체 없이 겉돌고 있다. 우리·국민·농협은행 등이 잇따라 '통일' 이름을 붙인 예·적금 상품을 내놓으며 경쟁을 벌이고 있으나 기존 상품과 차별화될 만한 것이 없다. 사실상 정권에 대한 아부성 상품이다. 그나마 산업은행이 독일재건은행(KfW)과의 협력을 통해 통일금융 노하우를 배우고 있다지만 코드 맞추기 식의 국책은행 금융정책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크다.

저축은행에 정부가 주문하는 '관계형 금융'도 개념이 모호하다. 정부가 저축은행 관계형 금융 활성화 방안을 내놓은 지 한 달이 돼가지만 업계는 조용하다. 업계에서 현실과 정책이 괴리됐다고 느끼는 부분은 두 가지. 장기 우량 고객을 확보하는 것과 새로운 고객을 유입시키는 것이다. 정부의 활성화 방안에 따르면 2년 이상 거래를 해왔고 회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개인과 개인사업자를 비롯한 법인 여신에는 일시적인 원리금 상환 유예나 이자 감면 등 채무조정을 해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저축은행에서는 고객들이 상황만 된다면 1금융권의 저리로 갈아타려고 하기 때문에 장기간 거래하는 우량 고객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새로운 고객을 유입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신용도가 내려가기 때문에 굳이 저축은행 대출을 이용할 사람이 없다.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이명박(MB) 정부 시절 붐이 일었던 녹색금융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며 "지금 정부도 기술금융이나 통일금융에 불을 지피고 있지만 실적 경쟁만 유도할 경우 정권이 바뀌면 어떤 운명이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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