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1년 8월 마한(馬韓)의 장군 맹소가 복암성(覆巖城)을 넘기며 신라에 투항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탈해 이사금 7년(63년) 10월의 기록에 '백제의 다루왕이 회견을 요청했으나 탈해 이사금 왕이 가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과거 마한에게 조공했던 신라가 마한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백제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은 신라가 백제와 대등한 관계를 강조하려 했음을 암시한다.
이에 백제는 응징을 위한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전개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다루왕 37년(64년)의 기록에는 "왕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병력을 옮겨 구양성을 공격했는데 신라가 기병 2,000명을 일으키자 이를 공격해 쫓아버렸다"고 적혀있다. 같은 해의 기록인 탈해 이사금 8년의 '신라본기' 에는 "8월에 백제군이 와산성을 공격했다. 10월에는 다시 구양성을 공격했으나 왕이 2,000명을 보내 물리쳤다"고 명시돼 있다. 엄연히 같은 사건을 두고 역사의 기록은 서로 자기편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백제와 신라 간 최초의 군사적 충돌이었으며 이후 600년 이상 계속될 긴 전쟁의 시작이었다.
역사, 특히 고대사의 시대 구분은 사가(史家)들이 임의로 나누어 놓은 경우가 많고 사료도부족하다. 게다가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주관적으로 기술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고대사에서 역사학자들이 객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고고학적 자료, 그리고 전쟁이다. 이 책은 한국의 고대사를 '전쟁'이라는 주제로 되짚어 보고 있다. 마한을 비롯한 초기 삼국이 기틀을 마련한 기원전 1세기의 서곡에서 시작해 신라가 백제ㆍ고구려와의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나ㆍ당전쟁을 종료한 676년까지의 약 700년을 아우른다.
신라와 백제가 처음 충돌한 와산성 주변은 이후에도 갈등지역으로 남아 170년에는 초고왕의 백제군이 이곳에 주둔하던 신라를 공격해 패배의 치욕을 갚고 경고를 남겼다.
반면 고구려는 건국 후 400년이 다 되어가던 4세기 중반까지도 신라, 백제와 특별한 접촉이 없었던 대신 거친 북방에서 홀로 '전쟁의 역사'를 써 갔다. 1세기 중반에 고구려를 다스린 태조대왕은 적극적인 영토확장에 나서 주변 소국을 차례로 병합했고 한(漢)나라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한반도 남쪽의 가야국의 경우는 왜국과의 전쟁이 잦았다. 또한 고구려와 신라의 충돌에는 유명한 온달장군의 원정이 있었고, 백제 무왕의 역습은 신라를 휘청이게 했다.
관산성 혈투, 안시성 전투, 매소천 결전 등 피로 얼룩진 전쟁사의 흔적이 흥미를 끄는 한편 "전쟁은 기존의 문제를 악화시키는 최악의 선택"이라는 저자의 목소리를 함께 전달한다.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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