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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86> 적당히 비워라, 당신의 목적을


흔히 ‘비어있다’고 말할 때 ‘공(空)’이라는 표현을 쓴다. 공터, 공허하다, 공상을 하다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공’ 개념은 중국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기원 후가 되어서야 쓰이게 되었다. 그 전에는 보통 ‘무(無)’라는 말을 구분 없이 썼었다. 고대를 살았던 현인 노자는 도덕경에서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음’이 전제되어 있기에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는 철학적 관점이다. 삶과 죽음, 선과 악, 기쁨과 슬픔. 그러고 보면 많은 진실들이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의 도시를 살아가다 보면 무엇인가 꽉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만 하더라도 예전처럼 공터가 많지 않다. 도심지의 낮은 건물을 부숴 고층 빌딩으로 재개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빈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무엇인가를 채우는 ‘정리 컨설팅’도 유행하고 있다. 그 범위가 크든 작든 간에 생산성과 효율성은 채움이라는 말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비어 있으면 비경제적이거나, 주인이 지나치게 여유있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24시간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상황이다. ‘생각하지 않을 여유’는 오로지 그 시간을 대체할 콘텐츠를 주입할 때에만 주어진다. 게임이나 종이접기와 같은 단순한 일을 하더라도 생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현실보다도 더 많이 머리를 써야 하는 콘텐츠나 게임 같은 것들도 많아졌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또는 무위(無爲)는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어느 카드 광고사가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는 카피 문구를 만들었겠는가. 삶의 장면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꽉꽉 들어차 있는 현대인에게는 숨쉴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하다. 때로는 수많은 인연이나 정보와 잠시 끈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는 시간 속으로 들어갈 만한 가능성이 제공되어야 한다.



어느 마케팅 전문가가 늦게 집에 들어가며 학원에서 귀가한지 얼마 안된 아들을 지켜보며 개탄했다고 한다. 핸드폰, 태블릿, 노트북 등을 늘어놓고 각각 다른 매체를 감상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좀 쉬지 그래.’ 아들은 매우 ‘명쾌하게’ 대답했다. ‘이게 쉬는 거야.’ 예전 같으면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전화를 꺼 두는 게 휴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의 최극단인 스마트폰을 통해 무한대로, 정해지지 않은 패턴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휴식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강박증, 습관, 중독 같은 말들이 하나로 엮여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모두 ‘일방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정한 지향점을 가지고 열심히 생각하고 행동할 때 그 사람이 ‘몰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몰입한다는 것은 일체의 다른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뜻한다. 때로는 예술 작품이나 꽃꽂이 같은 것에 집중하며 일상의 피로를 망각하기도 하지만, 일이나 계획에 몰입할 때에는 자아가 피폐해진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커다란 삶의 변화가 찾아왔을 때, 무방비 상태에 놓이기 딱 좋다. 우리의 삶을 새로운 장면과 기억으로 채워 가려면, 적당히 단절(斷絶)과 공동화(空洞化)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또 다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주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 약간의 변화와 비움을 거부하는 당신, 온몸을 뒤흔드는 급격한 변화가 찾아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열심히 하는 연습 못지않게, 아무것도 안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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