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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평그룹/확장… 변신… 끝없는 창조기상 충만(재벌)
입력1997-04-04 00:00:00
수정
1997.04.04 00:00:00
김희중 기자
◎기존인수업체갈등 고유문화 「도전 용광로」에 용해/「기업주 망해도 기업건재」 경영철학으로/지연·학연 철저배제 능력 최우선 고려서울 논현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거평그룹 본사건물에서는 화려함을 발견할 수 없다. 여느 그룹처럼 건물정면에 그럴듯한 조각품 하나 설치돼 있지 않고 그룹본사라는 명패도 없다. 거평을 나타내는게 있다면 건물벽에 쓰여진 「거평」이라는 두 글자 뿐이다. 22개 계열사에 자산규모 2조4천여억원으로 올해 공정거래위원회로 부터 랭킹 28위의 대규모기업집단(재벌)으로 지정된 그룹의 사옥치고는 너무 단촐하다. 이 건물이 요즘 「재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하고 있는 거평의 그룹사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층에 있는 나승렬 회장의 집무실도 소박하기는 마찬가지다. 꾸미기를 싫어하는 나회장의 성격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일을 볼 때 그는 항상 점퍼차림이다. 경리통답게 그의 자리 옆에는 분신처럼 주판이 놓여있다. 나회장은 어떤 신규사업을 벌일 때든 지금도 이 주판알을 튕긴다고 한다. 거평사옥의 외양이나 나회장의 집무실에서 볼 수 있듯 거평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그룹으로 면모를 갖춘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젊은 그룹이다. 그래서 패기가 넘친다. 거평의 기업문화를 한 단어로 축약한다면 「도전정신」으로 표현된다.
○그룹본사 명패없어
거평은 지난 79년 금성주택(현 거평건설)으로 출발한 이후 현재 22개사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6개만 설립했고 나머지 16개사는 인수합병을 통해 한 식구가 됐다. 인수한 각 업체들이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었음에도 거평가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도전」이라는 거평의 문화를 흡수해서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거평의 가족이 된 회사들이 비록 탄생과 인수되기 전까지는 다른 과정과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거평의 일원이 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나갔다.
사람으로 치면 거평은 이제 유년기를 지나 소년기로 접어든 기업이다. 젊음의 힘과 비전이 있다. 거평에는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난해말 대졸공채는 7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취업난도 한 원인이겠지만 거평이 잘나가는 기업, 힘있는 기업으로 인식된데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소년기의 거평은 맑고 꾸밈이 없다. 그러나 일반인들에 비치는 이미지는 그렇지 못하다. 대그룹들도 탐내는 굵직굵직한 기업을 인수합병하면서 성장, 자금출처를 놓고 항간의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거평이 대단한 기업으로 평가되면서도 올곧잖은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거평인들은 『회장의 인간적인 면이나 기업인수과정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같은 의혹은 잘못이다』고 말한다. 나회장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나는 모두 알다시피 국졸의 학력입니다. 출신도 기업하기 어렵다고 하는 전라도입니다. 그런데 무슨 배경이 있다고 특혜를 받겠습니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배경이 있었다면 그런 일을 당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기업인수과정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으며 떳떳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16개사 인수 합병
그런 까닭일까. 나회장은 정부의 인가를 받는 사업은 절대로 하지않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사업을 따내려면 줄과 뒷 돈을 대야하는 현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때 나회장은 방송사업을 하고 싶어 광주방송과 종로케이블TV를 추진했다가 미역국을 먹었다. 그 이후 절대로 인허가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거평의 기업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끊임없는 확장과 변신. 이는 나회장의 경영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업도 사람처럼 탄생성장노화의 사이클을 거친다』는 나회장은 『따라서 기업도 자기변신을 게을리하면 병이 나고 도태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오너는 기업을 관리하는 최고책임자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이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며 『따라서 기업주는 망해도 기업은 건재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기업관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나회장은 지금까지 기업을 인수해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남다른 기술을 발휘해 왔다. 이제 그는 기존기업과 인수기업의 조화와 내실화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21세기의 거평은 이제 겨우 스케치를 마친 상태다.
거평은 『반드시 제조업을 해야한다』는 총수의 소신에 따라 이 분야에서 활발한 변신을 하고 있다. 거평이 그룹이미지 광고에서 「산맥」을 내세운 것은 역사는 짧지만 뿌리가 굳건하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제조업을 통해 국가경제의 허리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거평은 현재 60% 정도인 그룹의 제조업 비율을 앞으로 80%까지 늘릴 방침이다. 제조업에서 돈을 벌어 R&D(연구개발)등 두뇌사업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R&D는 기업성장의 첨병이자 예측치 못하는 돌발변수를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된다는게 거평의 전략이다.
○인허가사업 손안대
제조업과 R&D가 거평의 아랫도리와 머리라면 팔과 허리는 유통과 금융부문이다. 작년 9월 개장한 대형도매센터 거평프레야를 비롯해 전남 장성의 농·축·수산물유통단지, 부산의 축·수산물 냉동창고, 서울·광주·대구의 할인매장, 서울·대구의 대형완구매장(토이랜드)등의 사업을 강화할 계획이다. 또 작년말 인수한 새한종금을 비롯해 강남상호신용금고 거평파이낸스 새한렌탈을 발판으로 종합금융기업으로의 확장도 꿈꾸고 있다. 거평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업확장의 모습이다.
나회장의 기업경영에는 몇가지 원칙이 있다. 그는 「재계 몇위」라든가 「세계제일」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목표에 너무 집착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70%론」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는 요즘 명예퇴직등으로 새롭게 사업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모두를 걸고 뛰어들면 모두를 잃을 수 있는게 사업입니다.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갖고 시작하면 오히려 성공합니다. 월급쟁이때는 상대방의 말을 1백% 믿어야 하지만 사업하면 상대방 말을 70%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기 당할때 절반의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R&D로 변수 극복
거평에는 다른 기업들처럼 학맥이나 지방색도 없다. 회장이 호남출신이기는 하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사람들은 철저히 능력에 따라 선발된다. 삼성맨들이 거평에 유난히 많은 것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두들 거평이라는 큰 산맥 아래 뭉치고 있다. 이제 새로 기업을 일구는 만큼 최고일류기업을 만들자는 의지로 가득차 있다.
거평은 재벌의 반열에 들어섰지만 아직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인수한 기업들의 고착된 이질적 문화를 그룹문화에 어떻게 융화시키느냐는 가장 큰 과제. 거평은 그동안 계열사간의 서로 다른 문화에서 오는 충돌로 마찰을 빚은 것도 사실이다.
그룹내 각 계열사들은 공기업으로서, 외국인회사로서, 유통사로서, 건설사로서 서로의 고유한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 어느정도 서로 다른 색채와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양보를 이끌어내 새로운 거평문화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이 그룹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김희중>
◎나승렬 회장 기업인수 철학/“기업인수 제1조는 잠재력 예측”
거평그룹에는 창업한 기업체보다 경영권을 인수한 회사가 많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골동품을 팔려면 서울 인사동으로 가고 기업체를 팔려면 나아무개한테 가야한다」고 말한다. 기업을 인수한다는 것은 인수자와 피인수자의 이해관계가 어느정도 맞아떨어졌을 때 가능하다. 공격적으로 경영권을 탈취해서는 안된다. 내가 실시한 기업인수도 철저하게 이런 원칙에 따라 이뤄졌다.
대한중석이나 포스코켐은 공기업 민영화차원에서, 시그네틱스는 필립스사의 해외투자 자본철수계획에 따라, 대동화학이나 라이프유통은 부실기업 정리차원에서 불가피하게 매각절차를 밟고 있던 업체들이었다.
기업경영이 그러하듯 돈이나 사람, 기타 재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시간을 아낀다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90년대초의 거평처럼 규모가 크지 않은 기업에서는 자금이 묶여서는 절대로 커나갈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자금이 재창출되도록 기업의 활동성을 높여야만한다.
나는 늦게 출발한 기업이 앞서가는 기업을 따라갈 수 있는 지름길은 기업인수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기업경영에 있어 축지법을 써온 셈이다. 그래서 나는 기업인수를 시간을 버는 방법으로 여기고 「시테크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용어를 만들어 즐겨쓰고 있다.
내가 사업을 확장할 때는 몇가지 원칙이 있다. 그 가운데 한가지는 어떤 업체를 인수할 때 그것이 다음 새로운 것을 인수할 토대가 될 잠재력이 있는가를 판단의 제1조로 삼고 있다. 나는 남들이 놓치고 보지 못하는 심층의 잠재력을 꿰뚫어보려고 노력했다. 무슨일이든지 시작하기 전에는 치밀하게 오랫동안 심사숙고하지만 마지막 승부수를 둘 때는 누구보다 과감하고 신속하게 결단을 내린다.
첫째 장기적 수익성, 둘째 단기적 유동성, 셋째 장기적 투자전망과 안정성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해서 신중하게 고른다. 사업가는 각 산업의 경기리듬을 예측할 수 있어야한다. 상호보완적인 사업구조를 편성해서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항간에는 거평의 급성장에 대해 여러가지 근거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으나 나는 그동안 수차례 받아온 세무조사를 또다시 받는다해도 결코 걱정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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