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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6월11일] 변법자강운동


1898년 6월11일 베이징 자금성. 청(淸)의 광서제가 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칙령을 내렸다. 골자는 입헌군주국가를 향한 위로부터의 개혁.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의 시작이다. 서구열강의 외교사절에게도 황제를 배알할 때면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땅에 찧는 ‘고두(叩頭)’ 의례를 강요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청 제국이 ‘서양 베끼기’를 공식 천명한 이유는 위기감. 아편전쟁 패배 이후 국토가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분할되고 청일전쟁에서도 패전하자 소장파의 개혁론에 힘이 실렸다. 광서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수렴청정하며 권력을 놓지 않던 서태후 세력은 불만이 많았지만 망국론이 도는 마당에 개혁 건의를 묵살할 수 없었다. 서구의 무기ㆍ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는 부국강병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28세의 젊은 황제는 40여개의 후속 칙령을 발표하며 개혁의 고삐를 당겼다.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부터 과거제도 개혁과 서양식 학교 설립, 산업의 보호ㆍ육성, 언론 활성화까지 황제제도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바꿀 기세였으니 반발이 따라 붙었다. 개혁의 칼날이 ‘부정부패와 탐관오리 척결’을 겨냥하자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쿠데타를 감행했다. 서태후가 조카인 황제를 감금한 후 개혁은 ‘10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광서제의 최대 실책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믿었다는 점. 갑오농민전쟁 당시 청군과 함께 조선 땅에 들어와 조선국왕을 핍박하는 등 악명을 떨쳤던 위안스카이에게 군권을 맡겼으나 쿠데타 측에 붙는 통에 개혁 엔진이 멈추고 말았다. 오늘날 중국은 110년 전과 딴판이다. 20세기의 절반 이상을 침략과 내전, 이념에 시달린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누구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엔진 과열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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