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이런 나를 누가 기억해줄까. 사건과 영웅으로 가득찬 역사에 나의 생각과 생활이 남겨질 구석이 있을까. 있다. 개인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감춰진 이면이 아니라 최소 단위이자 본질이기 때문이다. 도서출판 새물결이 펴낸 번역서 '사생활의 역사'에는 지구촌 갑남을녀의 생활과 생각이 치밀하게 그려져 있다. 책은 방대하다. 권당 1,000여쪽, 5권의 분량이 5,000여쪽에 이른다. 지난 2002년 1ㆍ3ㆍ4권이 소개된지 4년 만에 2권과 5권이 나왔다. 내노라 하는 역사학자 40명이 집필한 대작이다. 이만큼 장대한 분량의 인문서적 번역본이 마침내 완간됐다는 점 자체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개개인의 생활사가 어떤 의미가 있기에 책의 완간을 반길까. 20세기 역사학의 지평을 넓힌 프랑스 아날학파의 입을 빌리자. '특정 사건이나 유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점과 점으로 연결된 역사를 사실로 인식하기 보다는 평이한 사람들의 생활과 흐름을 파악하는 게 역사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60ㆍ70년대 고도성장을 정부정책과 성장률로 파악하기 보다 동네 마다 하나씩 있던 국수 공장이며 봉투나 인형의 눈알을 다는 집안 풍경, 편물기를 돌리던 가내 수공업의 실상을 통해 조명하자는 것이다. 로마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파악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그림. 화가들이 남긴 회화작품 3,000여점을 다각도로 해석, 당시의 생활상을 재연한다. 둘째 수단은 텍스트다. 국가가 세금을 걷고 '신민(臣民)'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정밀하게 작성한 문서가 역사를 재구성하는 프리즘이다. 기록을 뜯어서 바라본 개인의 역사는 기존관념의 벽을 넘는다. 절대왕권이 힘을 떨쳤던 근대를 이끈 동력은 국가적 목표, 동원, 과학적 발견에 대한 열망으로 생각하지만 그 바닥에는 개인과 가정이 존재한다. 5권의 한 대목. '방은 개인의 은둔이 보장되는 절대공간이었지만 부르주아들의 응접실은 개인영역과 공적생활의 공통 공간이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사생활을 보호할 담조차 쌓을 수 없었다. 사생활을 누린다는 점 자체가 계급적 특권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관행이 모든 계층에 서서히 퍼져나갔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와 경제 발전, 풍요로의 이행은 '사생활 민주화의 역사'다. 책은 재미 있다. 50년전 여성들은 얼마나 자주 씻었는지(4명중 한명은 이를 전혀 닦지 않았고 열명중 여섯명이 한달에 한번 목욕했다), 가내 수공업에서 외부의 대형공장으로 어떻게 이행했는지 과정을 그림과 통계, 기록, 심지어 여성잡지까지 동원해 생생하게 말해준다. 한계도 있다. 5권(1차대전에서 현대까지)을 제외하면 거의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해부 뿐이다. 자신들이 유럽과 서구문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문화적 우월감이 책에 전편에 흐른다. 한편으로는 부럽다. 1985년 초판이 발간 당시 프랑스에서만 20만질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프랑스의 문화적 저력이 느껴진다. 우리는 어떨까. '나'의 생각과 생활사는 기억되고 권당 4만3,000원씩 나가는 책으로 엮어져 다른 나라에도 소개될 날이 과연 올까. 개개인에게 달렸다. '사생활'의 집합이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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