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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좋아하던 산골소년 대학서 처음 접한 연극에 반해
대기업 입사 1년반만에 관두고 무대 디자이너로 첫 발 내디뎌
연극·뮤지컬서 무용·국악까지 장르 넘나드는 개성강한 무대 정평
숨가쁘게 걸어온 28년 외길 작업 되돌아보는 작품집 내고파
무대는 극장에 들어온 관객이 마주하는 작품의 '첫 얼굴'이다. 막이 오른 뒤 색색의 조명과 배우를 만나 무대가 깨어나면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관객을 사로잡을 작품의 첫인상을 창조하는 무대미술을 '시각적 극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관객은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즐기기 위해 공연을 봅니다. 무대미술도 작품의 시각적 환경을 제공하고 주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연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작업이죠." 연극·뮤지컬부터 오페라·무용·국악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개성 강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 박동우(사진) 디자이너를 그의 서초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업실 벽의 대형 화이트보드 위에는 몇 달치 일정표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인기리에 공연 중인 뮤지컬 '인더하이츠'와 '올드 위키드 송', 최근 막 내린 '명성황후'와 '아리랑', 그리고 18~19일 프랑스에서 열리는 '한불 수교 130주년 종묘제례악' 공연과 오는 10월 개막하는 연극 '키 큰 세 여자'까지. 28년 차 디자이너는 여전히 손과 발, 머리를 굴리며 쉼 없이 무대를 빚어내고 있다.
◇지금, 여기, 그리고 왜=디자이너 박동우의 필모그래피는 그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작품을 여기서 왜 하는가.' 박 디자이너는 "이 질문에 답을 내기 어려운 작품은 결과물도 좋을 수 없다"며 "이런 것은 욕심 내 하지 않는 게 옳다"고 말했다. 첫 번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두 번째 답을 찾는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관객 대부분은 오늘을 사는 불특정 다수의 대한민국 사람이에요. 그들에게 텍스트 단계의 작품을 어떻게 전달하고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 단계에서 무대의 큰 방향이 정해지죠." 예컨대 지난해 참여한 연극 '사회의 기둥들'은 극이 진행될수록 서서히 옆으로 기우는 무대로 화제를 모았다. 존경 받는 노르웨이 소도시 영주의 위선과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낸 이 작품을 연구하며 박 디자이너는 '침몰해가는 배의 선실' 같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원작의 배경인 노르웨이의 1870년대 이야기를 박제하듯 보여주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며 "고민 끝에 양심을 저버리고 이익을 좇는 영주의 거실을 선실처럼 묘사했다"고 설명했다.
◇대학 가서 만난 '연극'이라는 신세계=박 디자이너의 유년시절은 사실 공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산골에서 태어나 개구리 잡고 놀던 그는 "공연이란 게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기차를 봤으니 말 다했다. 대학에 가서야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연세대 경영학과 입학 후 기웃거린 동아리는 그림·사진·연극 등 죄다 예체능 쪽이었어요. 사진반은 카메라가 없어서 못 들어가고(웃음) 고등학교 친구 따라 연극반에 놀러 갔는데 분위기에 반해 저도 발을 들였죠." 미술을 좋아하고 한때 소설가를 꿈꾸기도 했으며 대학 건축과 진학을 고려했던 그에게 연극의 무대미술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담긴 종합세트'였다.
◇대기업 그만두고 '무대 디자이너'로=좋아서 시작한 일은 진로도 바꿔놓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번듯한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1년 반 만에 제 발로 나왔다. "회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만 커지더군요. '무대미술가'라는 이름도 낯선 시대였지만 저는 이 일이 충분히 직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 길로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 들어갔다. 자처한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당장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회사 로고부터 인테리어, 인쇄물, 심지어 놀이공원 퍼레이드 세트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이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1986년, 산울림 소극장의 공연 포스터 디자인을 맡아 임영웅 연출을 만난 자리였다. "선생님, 저는 포스터보다 무대 디자인을 더 잘하는 사람입니다." 연극계 거장은 당돌한 청년의 패기를 높게 사 기꺼이 무대를 맡겼다. 이듬해인 1987년 공연한 '숲 속의 방'은 그렇게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의 데뷔작이 됐다. "데뷔 후에도 일이 어느 정도 자리 잡기까지 공연 일을 하면서 광고회사 직원, 놀이공원 계약직, 또 다른 광고회사 계약직, 대학원생으로 1인 다역을 하며 바쁘게 살았어요. 운 좋게 고비마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韓 뮤지컬 자신감 얻게 한 '명성황후'=박 디자이너의 작업실 2층에는 그동안 만들었던 무대 모형이 층층이 쌓여 있다. 하나같이 창작의 산고를 겪으며 빚어낸 '새끼 같은 무대'다. 그중에서도 뮤지컬 '명성황후'는 가장 마음이 가는 작품이다. 명성황후는 1995년 초연 후 1997년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공연을 펼쳤다. "당시만 해도 다들 '우린 브로드웨이보다 여러 수 아래'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죠. 처음 독특한 회전무대 도면을 받아들고 '저게 되겠느냐'고 의심하던 현지 관계자들이 공연을 보고 다들 놀라더군요. 그 공연을 통해 저는 물론 많은 한국 공연 스태프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28년 외길, 작업 돌아보는 작품집 내고파=정신없이 무대를 빚는 동안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무대미술은 비닐하우스나 빈 축사에서 공연하던, 가내수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부터 전용극장에서 첨단기술을 뽐내는 지금까지 시대와 기술은 바뀌었지만 박 디자이너가 철칙처럼 추구하는 '완성도'는 변함이 없다. "제아무리 예쁘고 멋져도 0.1초, 1㎜의 오차로 극의 분위기가 코미디로 바뀌어 버리는 게 무대 세트입니다. 무대미술이 과정부터 결과까지 모든 면에서 완성도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죠." 그는 요즘 작업실 2층을 채워가는 입주자(?)들을 바라보며 의미 있는 작업도 그려보고 있다고. "2년 뒤면 이 업계에 발을 내디딘 지 30년이 되는데 만날 코앞의 일이 바빠 그동안의 작업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네요. 30년이 되는 해에는 무대 제작 및 관련 자료를 모아 작품집을 내고 싶어요." 완성을 향한 무대미술가 박동우의 '도전의 기록'이 벌써 기대된다.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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