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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신흥국 동반 침체에 시장금리도 역대 최저수준
단기간 성장으로 고비 넘긴 과거 침체 때와 상황 달라
위기 타개할 새 해법 필요
외환위기를 겪은 후 한국의 금융산업은 빠르게 성장해왔다. 지난 1998년 890조원이던 총 자산은 올 2ㆍ4분기에는 3,233조원으로 올라갔다. 외형이 커지면서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5.71%(1998년)에서 6.31%로 커졌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지난해 은행 부문에서만 11조8,0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저금리와 국내외의 저성장, 각종 금융규제, 가계대출 부실 등의 악재가 금융산업을 동시에 억누르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지난해와 올해의 상황에 대해 "별이 생명을 다할 때 마지막으로 가장 화려하게 빛을 내는데 지난해가 꼭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악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장 내년부터는 바젤Ⅲ 등 글로벌 금융규제가 새로 시작되고 대선 과정에서 나온 경제민주화 공약이 금융산업을 옥죌 것이 확실하다.
대형금융지주의 재무담당 최고경영자(CFO)는 "안팎의 악재에 대비해 방파제를 쌓아야 하는데 솔직히 방파제를 쌓을 여력을 주지 않고 있는 게 현재의 구도"라고 말했다. 표를 의식한 각종 공약, 인기에 치중하는 감독정책 방향 등으로 위기에 대비한 곡간을 쌓을 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의 수준, 과거와 다르다=저성장은 저소비ㆍ저생산ㆍ저투자 등으로 이어진다. 자칫하다가는 극심한 경기침체도 낳는다. 실물침체로 이어져 개인ㆍ기업의 연체가 급증하고 산업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우리의 경우 GDP가 3% 성장을 밑돌 때를 '위기'로 규정하는 이유다. GDP가 3%를 밑돈 경우는 올해를 빼고 모두 5차례다. 1980년 2차 오일쇼크(GDP -1.9%),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5.7%), 2003년 신용카드 사태(2.8%), 2008년ㆍ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2.3%ㆍ0.3%) 등.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올해를 뺀 과거 다섯 차례의 위기는 단기간에 성장을 회복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면서 "해외시장의 수요증가 등 우호적인 대외여건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올해부터 불거질 위기의 상황은 과거와 다르다. 글로벌 과잉유동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내수와 수출의 동반부진도 심화하고 있다. 시장금리는 역사상 최저 수준이고 여신금리는 1996년 이후 가장 낮다. 금융감독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선진국과 신흥국의 동반침체 등 대외여건 취약하고 회복을 이끌 성장동력도 부재한 것이 현재 위기의 모습"이라면서 "경기부진 장기화에 맞춰 금융산업도 준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곳곳에서 한계 보이는 금융산업=성장은 했지만 금융산업은 여전히 한계는 많다. 전세계 200대 기업(포춘지 선정)에 국내 제조업은 5개가 포함된 반면 금융산업은 없다. 또 글로벌 시장 진출을 무수히 시도하고 있지만 은행의 초국적화지수는 3.5%다. HSBC(64.7%), UBS(76.5%), 씨티그룹(43.7%) 등에 비해서는 한참 낮다. 더욱이 고용에 대한 기여도도 3.3% 수준, 특히 정규직에 대한 기여도는 1%에 그치고 있다.
금융산업 내의 밸런스(균형)도 찾지 못하고 있다. 금융산업의 총자산에서 은행의 비중이 64.5%에 달한다. 은행지주의 경우 계열 은행에 대한 자산의존도가 86.1%(1,585조원)다. 보험ㆍ여신ㆍ증권 부문 등이 더 성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은행의 경우에도 이익이 지나치게 이자이익에 쏠려 있다. 지난해 국내은행이 이자이익으로 39조1,000억원을 벌어들인 반면 수수료ㆍ신탁이익 등 비이자이익은 8조5,000억원에 그쳤다. 윤창현 금융연구원장은 "금융산업이 성장을 많이 했고 건전성도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현 상황을 보면 체력이 많이 고갈돼 있다"면서 "체력이 고갈된 환자는 자구노력과 함께 금융당국의 정책적 배려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밸런스 맞추고 체력 키워야= 금융감독당국이나 금융계는 현 위기를 극복하고 또 다른 성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밸런스와 체력'을 강조한다. 두 가지만 갖추면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글로벌 경쟁력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해법을 놓고서는 조금씩 다르다. 금융감독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현 상황을 너무 비관할 필요도, 너무 낙관할 필요도 없지만 업계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면서 "단기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좀 더 긴 호흡으로 금융산업을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탐욕의 금융' 등이 재발하지 않도록 큰 그림을 그려달라는 얘기다. 반면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위기를 과장할 필요 없이 냉정하게 접근하는 게 당국이나 업계에 중요하다"면서 "위기의 징후가 채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당국 스스로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너무 과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각종 규제카드를 꺼내고 금리ㆍ수수료 인하 등을 당국이 유도하는 상황에서는 위기 대응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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