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미국에서 스티브 잡스의 췌장암 투병과 관련해 애플이 최고경영자(CEO)의 질환 사실을 일반투자자에게 공시할 의무가 있느냐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같은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면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거래소 기업공시 규정에는 CEO의 건강 상태에 대한 공시 항목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규정에 나열된 공시 항목에 대해서만 의무를 부담하는 '열거주의' 체계는 기업 입장에서 복잡한 판단이 필요 없는데다 공시 자체만으로 의무를 다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다만 획일적인 규정으로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이 뿐만 아니라 투자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이라는 이유로 정보가 제공되지 못한 채 누락될 수도 있다.
이 같은 열거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공시 체계가 바로 '포괄주의' 방식의 공시이다. 미국·영국·홍콩 등 우리나라를 제외한 해외 대부분의 거래소가 도입한 포괄주의 공시 체계는 투자자에게 제공될 중요 정보가 규정에 의해 획일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기업 스스로 투자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에 대해 탄력적으로 공시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물론 기업의 자율적인 결정에는 책임도 함께 따라줘야 한다. 이렇게 되면 투자자는 기업의 중요한 정보를 투자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포괄주의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예전부터 이어져왔다. 해외 주식 시장과는 다른 문화 때문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주식 시장은 지난 10여년간 전체 공시 중 20% 정도가 자율공시에 달할 만큼 성숙한 공시 문화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최근 금융위원회는 '기업공시제도 개선 방안' 중 하나로 포괄주의 공시 체계의 첫 발을 드디어 내딛게 됐다. 우리나라의 공시 문화가 해외 시장과 다르다는 일각의 우려를 감안해 충분한 조사와 의견수렴 등 준비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추진해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포괄주의라고 해서 모든 판단을 기업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시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 예시를 제시하는 등 가이드라인을 갖추고 다양한 사례를 축적해 체계 변경에 따른 혼란을 방지할 예정이다. 포괄주의를 도입한 해외 여러 국가에서도 각종 예시사항과 가이드라인을 통해 투자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사려 깊은 재단사라도 모든 사람의 체형에 맞는 옷을 미리 만들 수는 없다. 공시 규정도 마찬가지다. 공시 규정이 아무리 세밀하게 규정돼 있어도 산업 동향에 따라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는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포괄주의 공시 체계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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