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경남 양산 화인테크놀리지 본사 공장. 서영옥(56ㆍ사진) 화인테크놀리지 대표는 주변에서 여걸로 소문난 인물답게 짱짱한 목소리로 취재진을 반겼다. 서 대표는 인터뷰에 앞서 본사 1층에 전시된 화인테크놀리지 한마음 가족음악회 사진과 본사 엘리베이터를 소개하며 "매년 창립기념일에 음악회를 연다"며 "장애우 직원을 위해 처음 공장 설립 때부터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는데 주변 회사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설명했다.
1998년 설립한 화인테크놀리지는 고분자물질을 활용해 반도체ㆍ인쇄회로기판(PCB) 등 전기전자용 테이프, 건축자재ㆍ자동차 등 일반 제품 표면보호용 테이프 등을 생산하는 알짜 중소기업이다. 2010년 기준 매출액은 142억원. 일본기업들과 당당히 경쟁하며 수출액도 꾸준히 늘려 2010년 무역협회로부터 5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서 대표는 어머니 같은 리더십으로 유명한 최고경영자(CEO)다. 직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염려해 현장에서 마스크를 반드시 쓰도록 항상 독려하는가 하면 기계장비도 사람이 근처에 가면 자동으로 정지하도록 개선했다. 과거 금융위기로 회사 실적이 크게 흔들릴 때 오히려 강사를 초빙해 일본어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잔업시간을 채워 수당을 모두 챙겨주기도 했다.
이를 증명하듯 대표이사실 한켠에는 직원들이 직접 만들어 준 감사패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서 대표는 "월급만 준다고 대표의 역할이 끝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의 마음을 사야 한다"며 "그래서 얼마 전 직원들이 몰래 만들어 준 감사패가 내겐 그 어떤 상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회사에 젊은 직원이 많은데 기업이 어려움에 빠져도 직원 복지비용은 더 쓰면 더 썼지 절대 안 깎는다"며 "직원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내게 가장 먼저 연락할 정도"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성으로는 드물게 화학제조회사를 운영하는 서 대표는 고등학교 때부터 화학공학과에 진학하며 공업인으로서의 꿈을 다졌다. 당시만 해도 공업고등학교에 여학생이 극히 드물어 전체 1,400여명의 학생 가운데 여자는 10명이 채 안됐다고 한다. 그는 이후에도 화학공학 분야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하며 전문가가 됐다.
서 대표는 "당시만 해도 여성은 상고를 나와 회사 경리가 되는 게 그나마 성공적인 삶이었고 집안에서도 그렇게 살길 바랐다"며 "그러나 원래 과학을 좋아한 데다 과학이 발전하면 경리가 쓰는 주판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으로 판단해 고등학교 시험도 부모님 몰래 봤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서 대표가 처음부터 사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다. 페인트 회사 연구원으로 시작해 산업용 테이프를 만드는 한 중소기업의 연구실장을 지내는 등 30대 초반까지는 사업에 뜻이 없었다. 그러다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마련한 기술지도 프로그램에 참가해 외국인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생각이 바뀌게 됐다.
"당시 기술지도를 받으며 외국인 엔지니어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 하는지 배우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제품 표면보호용 테이프 자체가 수입하기에는 비싸고 국산의 품질은 조악해 사업을 한번 해보자는 판단을 했지요."
결국 1987년 서 대표는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당시에는 전기전자용 테이프보다는 표면보호용 테이프만 생산하는 분야에 매진했다. 이후 회사는 번창했지만 표면보호용 테이프에 대한 수익성은 갈수록 떨어졌다. 서 대표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대학에 들어가 박사 과정을 밟는 결단을 내렸다. 서 대표가 공부를 마친 뒤 전기전자 등 부가가치가 높은 테이프 사업 위주로 재창업한 것이 지금의 화인테크놀리지다.
그는 "창업할 때만 해도 100억원에 달하던 부채를 어떻게 다 갚았는지 스스로도 신기하다"며 "보통 사업이 잘 되면 부동산 등 다른 쪽에 손대는 경우도 많은데 절대 과도하게 사업을 벌리지 않고 철저히 영업활동에만 집중해 온 게 경영 원칙이었다"고 강조했다.
서 대표는 사회 화두가 된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대기업이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품질도 관리되는 것"이라며 "대기업이 비판을 많이 받지만 사회 발전을 위해 담당한 역할은 인정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이어 "화인테크놀리지를 포함해 중소기업의 경우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면 국가지원을 너무 바라지 말아야 한다"며 "이미 큰 회사가 지원을 계속 받으면 후배 기업에 갈 몫은 어디 있겠느냐"고 소신을 폈다.
서 대표는 화학공학 분야 현장에서 쌓은 지식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벌써 20여년째 경남정보대학 신소재공학과에서 겸임교수를 맡으며 정밀화학공업 분야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 지금도 1주일에 6시간씩 강의하고 있다.
서 대표는 "강단에 서는 것은 지식전달 뿐 아니라 실제 기업에서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알려주려는 목적도 있다"며 "젊은 학생들 정신교육을 하러 간다"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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