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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엡도'가 당한 충격적인 테러 사건 이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언론과 예술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쪽과 특정 종교나 인종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표현의 자유는 일정한 제약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주장은 갈린다.
그렇다면 예술은 언제부터 '표현의 자유'를 누려왔을까? 답부터 얘기하자면 '얼마 되지 않았다'. 스페인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가 그린 '벌거벗은 마하'(1800~1803년 제작 추정)라는 유명한 그림을 보자. 서양미술사 최초의 누드화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완전 나체의 여인이 정면으로 누워있어 음부는 그림 가운데 위치했고 손은 머리 위로 들어올려 가슴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전까지는 벗은 여성이어도 손이나 나뭇잎 등으로 몸 일부를 가리거나, 큐피드 등을 배치해 신화적 인물로 포장해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야가 활동하던 스페인은 공식적으로 누드를 금지하고 있었다. 고야는 당시 국왕 카를로스 4세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그렸던 것. 하지만 궁정화가가 그린 도발적 누드화는 사회적 분노와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이후 1805년 고야는 그림 한 점을 더 그렸다. 바로 '옷을 입은 마하'다. '벌거벗은 마하'와 똑같은 인물의 똑같은 자세이나 화려하게 치장한 채 옷을 입고 누웠다. 누드그림 때문에 종교재판정에까지 섰던 고야에게 이 '옷을 입은 마하'는 일종의 피신처 역할을 해 줬던 것 같다.
고야는 궁정화가지만 작품을 통해 과거의 인습을 벗어나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하려 노력했다. '표현의 자유'가 공론화되기 전 그 씨앗을 준비한 세대라 할 수 있다. 미술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야의 그림은 프랑스 점령군의 스페인 양민 학살을 그린 '1808년5월3일'이 대표적이지만 그는 종교적 주제 혹은 요괴와 마녀를 주인공으로 한 기괴한 판화연작을 남겨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왕명에 저항한 적은 없으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에서 왕비와 그녀가 재상과의 불륜으로 낳은 2명의 사생아를 한가운데 그린 것을 보면 왕을 향해 은근한 풍자와 조롱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말년에 고야는 왕실에 병가를 낸 뒤 망명하다시피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따져보면 '표현의 자유'는 백년 남짓한 역사를 갖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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