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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미국은 어떻게 바라봤나

'관찰자' 아닌 '관계자'…점차 회담개입 강도 높혀

미국은 13년 8개월을 끌었던 한일회담을 어떤시각으로 바라봤고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외교통상부가 26일 한일회담 전 과정을 담은 문서 156권, 3만 5천페이지를 공개하면서 사실상 회담 전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드러나 관심을 끌고 있다. 한일협정이 기본적으로 양자관계라는 점에서 미국의 역할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문서에 비친 미국의 모습은 단순한 `관찰자'라기보다는 `관계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간 학계에서는 2차대전후 냉전구도가 고착되면서 미국은 반공전선의 교두보구축 차원에서 한국과 일본이 구원(舊怨)을 털고 결속할 것을 강하게 희망했고, 이를 위해 한일수교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으며, 따라서 한일회담의 시작과그 과정에 미국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고 주장해왔다. 한일회담을 정확히 살펴 보려면, 우선 그 기원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먼저살펴 볼 필요가 있다. 2차대전 전쟁배상 요구를 위해 마련된 1951년 8월13일 강화조약에서 한국은 서명국 자격을 얻으려 했으나 미국 등의 전승국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된 것이 한일회담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일본을 상대로 전쟁배상 요구를 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 대신 강화조약 4조 B항에 "일본은 한국에서 미 군정 또는 그 지령에 의한 일본 국민의재산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는 조항이 명시돼 이를 근거로 한일청구권 협상이 시작됐다. 한일회담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20일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중재하에 도쿄에서 처음으로 일본과 공식대좌를 통해 그 문이 열렸다. 연합군이 사실상 미군 지휘하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요구에 의해 한일회담이 시작된 셈이다. 특히 전쟁 수행중인데도 불구, 미국이 한일회담을 중재한 점만 봐도 얼마나 반공전선 구축을 위한 교두보 마련에 부심했는 지를 엿볼 수 있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남하와 중공의 등장에 긴장한 미국은 이에 대처하기위해 동아시아지역 통합전략을 적극 추진했으며, 이를 위해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는 반드시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의 골이 워낙 깊이 패였던 터여서 한일회담은 1차에서 3차까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에는 미국의 역할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문서상에 미국의 그림자는 1960년대 초반부터 비친다.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가 "한일회담에 미국의 직접 개입은 곤란하다. 한일교섭도 결국 정치적 결정이 행해질 것이라고 판단된다. 문제의 핵심은 일본이 어느 정도의 금액(청구권 협상과 관련해)을 내놓을 지가 관건"이라고 발언한 게 1961년 10월즈음이다. 실제 한일회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1962년 9월 당시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의 이름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보낸 서한에서도 확인된다. 박 의장은 서한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에 귀하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그교섭을 주지하고 계신데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한다"며 회담이 교착된 원인이 일본이과거관계에서 연유하는 우월감으로 회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라며 사실상 지원을 요구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1963년 7월에 당시 김동조 외무부 장관의 미국방문때 사용하려 했던 외교문서에서는 `한일회담과 미국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눈길을 끈다. 문서는 "한국민 일부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의 한.미.일 3국의 관계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으며, (그 의구심은) 한일관계 정상화 이후에는 미국이 한국에서 부담하고 있던 군사적, 경제적 원조기능을 일본에 넘기지 않을 까 하는 것으로 한국민은 그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서는 이어 "미국이 한일회담 이후에도 미국이 원조기능의 역할을 해야 하고한일 국교정상화 직전에 3국간 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부언했다. 미 대통령의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도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시 존슨 미 대통령이 박 대통령에게 한일국교정상화는 극동 안정에 막대한 공헌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는 1964년 2월28일 주미대사가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을 면담한 뒤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서 나타났다. 문서는 러스크 장관이 이 같은 사항을 언급한 뒤 국교정상화는 한국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문서는 "러스크 장관은 현 정세는 한일회담 타결에 좋을 것으로 보며 타결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그는 5월 중순에 끝날 일본국회 회기가 끝나기 전에 일본국회에서 조약 비준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이 조속히 종결되기를 희망하며 이러한의도에서 금일 본직과 일본대사를 초치해 면담하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한일협정 성사를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1964년 7월께에는 미국의 조급한 태도도엿보인다.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가 "회담의 조기타결이 어려울 경우에는 주한 일본대표부의 설치를 허락해 사실상 수교관계를 긴밀화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당시주일 한국대사에게 전한 것도 이 즈음이다. 한발짝 더 나아가 그 한달후인 8월17일에는 한국의 외무장관과 주한 미대사간에"미국은 한일간 제 현안의 조기타결을 위해 가능한 지원을 하겠다"는 공동성명도 나와 미국의 분명한 의지가 표출된다. 협정 타결(1965년 6월22일)을 3개월 앞둔 3월16일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일본이보다 더 양보해야 한다는 우리측 주장을 납득하고 협조를 약속하며, 4월29일에는 번디 미 국무부 차관보가 박정희 대통령 방미전에 한일협정이 타결되기를 강력히 희구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이번에 공개됐다.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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