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의 손길을 뻗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31살의 청년은 러시아측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오는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작은 키의 늙은 남자가 이토임을 직감했다.
9시30분께 이토와의 거리가 열보 안팎이 되자 청년은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이토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총을 쏜 후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안중근 의사의 과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코레아 우라'는 이토 저격 성공 이전부터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의 과정, 일본의 영웅이었던 이토를 죽인 안 의사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된 일본인들과의 일화를 구체적으로 담으며 일제강점기 시절로 독자들을 이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결연한 의지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안중근 의사가 의병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포한 일본군을 '그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는 이유로 풀어주는 장면을 통해 합리적이며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안 의사는 단순히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을 사살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토를 죽인 이유는 나라를 빼앗은 원흉을 제거하겠다는 복수심보다는 그를 제거하지 않을 경우 동아시아의 평화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토를 저격한 후 "왜 이토를 죽였냐"는 미조부치 다카오 검사의 질문에 '명성황후 시해','무고한 한국인들 학살' 등의 이유를 열거한다. 안 의사는 이 중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가 가장 크다"고 언급했다.
저자는 안중근 의사와 구리하라 사다키치 뤼순형무소장과의 대화를 통해 안 의사가 생각하는 평화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
"당신이 생각하는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구리하라 소장의 질문에 안 의사는 "내가 당신을 때리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를 때리지 말란 것"이라며 "힘의 논리로 힘센 나라가 자신들보다 약한 나라를 침략해 빼앗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일본 역시 다른 힘 있는 나라에게 한국과 같은 비극을 겪게 될 것이오. 내가 생각하는 평화는 그뿐"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안중근 의사의 당당함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어진다.
안 의사는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일본인으로 이뤄진 법정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게 범죄라고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또 앞으로 저지를 참혹한 살인과 만행을 의병장의 자격으로 막았으니 이는 결코 범죄라고 할 수 없고, 나는 한국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이 일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고 당일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자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며 미나베 판사를 포함해 법정에 온 일본인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그의 의연함과 평화에 대한 의지는 결국 그에게 적의를 품었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안중근 의사를 영사관에서 뤼순형무소로 이송하고 이후에도 호송 임무를 맡았던 지바 도시치 헌병은 3월 26일 안 의사가 순국한 후 여생을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며 살았다.
일본 동북지역에 있는 센다이에 다이린지라는 사찰에는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셔져 있다. 위패를 모신 이는 바로 지바다. 그는 안 의사의 위패를 매일 찾아가 추모하다가 1934년 사망했다. 그는 아내에게 안 의사의 위패 옆에 자신의 위패를 두라고 유언을 남겼다.
염수정 추기경은 "2015년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5년이 되는 해"라며 "안 의사의 숭고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화합과 평화의 길을 열어가기를 희망한다"고 추천사를 남겼다. 1만 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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