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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82> 납량특집과 문화융성


여름철 ‘납량특집’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공포영화다. 납량특집이라는 단어 어디서도 공포라는 뜻이 없는데도 말이다. 원래 ‘납량’은 여름철 피서(避暑)를 떠날 여유가 없는 사람이 적은 돈을 들여 더위를 잊는 방법을 총칭하는 표현이었다. 과거 일본인들은 천변(川邊)에 건물과 덧대어 커다란 마루 같은 형태의 ‘노료유카’(납량상, 納凉床)라는 것을 설치했다. 물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혹서(酷暑)를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다. 강가에 배를 띄워 술과 음식을 즐기며 더위를 피하는 방법인 ‘노료부네’(납량선·納凉船)도 있었다. 서민들은 돈을 모아서 얼음을 사 먹거나 함께 차가운 면을 먹는 ‘납량회’를 하기도 했다. ‘납량’의 어원은 이렇듯 일본에서 비롯됐다. 그러다 17세기 말엽 본격적으로 일본의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납량 콘텐츠가 생겨났다. 서민예술을 대표하는 가부키 극장마다 여름이면 괴담(怪談)을 상연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몇십 년이 흐른 지금 괴담 문화는 더 대중적인 콘텐츠가 됐다. TV만 살펴봐도 매해 여름 공포 영화, 드라마가 정기적으로 편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때 ‘전설의 고향’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최근 지상파에서는 공포물이 자취를 감췄지만 여전히 케이블 채널 곳곳에서 방영 중이다. 어쨌든 더 쉽게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인 것만은 분명하다.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TV만 틀면 ‘납량특집’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자는 사람들이 왜 무서운 영화를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납량특집이 생겨난 사연을 알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서민 대중이 더위를 싹 잊을 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소재와 구성을 다양하게 하다 보니 ‘공포’라는 장르까지 형성됐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요컨데 창조적인 문화콘텐츠의 출현은 소비자들의 수요를 기반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경제학자 리처드 케이브스(Richard Caves)는 유명한 저서인 ‘창조 산업’(Creative industries)에서 영화, 무용, 연극 등이 처음 시도되고 자리 잡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일반 민중의 수요를 읽어낸 제작자들의 기업가 정신에 대해 언급했다. 문화융성의 비결은 일부러 조성된 국가 정책보다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사업가적 혁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요체다.

지난 토요일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문화융성을 창조 경제의 핵심 어젠다(agenda)로 이끌고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광복절 기념식 끝 부분에서는 우리의 70년 역사를 축약한 ‘미디어 융복합 공연’이 상연됐다. 정부 차원의 ‘문화 기술’(Cultural technology) 성과를 뽐내기 위해 마련된 무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무대가 대중이 원하는 콘텐츠일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새로운 문화다’라고 목놓아 주장하는 것만 같아서 정부의 지금 모습은 부자연스럽다. 문화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물처럼 우리 생활에 스며드는 습관 같은 것이니까. 납량특집이 생겨나 여름철 안방극장을 장악했듯이,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관찰하고 고민한다면 문화융성은 당연한 결과로 뒤따르게 된다. 문화융성의 실마리는 언제나 대중에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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