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산관야복(山冠野服) 은자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은 일이려니. 여러 천년을 이대로 전해지기를 헤아려보는구나."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19세이던 1437년 어느 봄날 꿈 속에서 무릉도원을 보고 당시 최고의 산수화가인 안견을 불러 이를 그리게 한다. 안견이 단 사흘 만에 그려온 것이 중국 동진시대 시인 도연명이 노래한 '도화원기(桃花源記)' 속 세상, 그곳을 꿈 속에 거닌 풍경이었다. 삼 년여 지난 겨울밤 안평대군은 그림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라 이름 붙이고 이 글을 얹었다. 수천년 길이 전해지기를 기대하면서.
요절한 숙부 성녕대군의 후사를 이으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안평대군은 어린 나이에 많은 문객을 거느리며 풍류를 즐겼다. 그 자신도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능했고, 특히나 원나라 조맹부의 글씨인 송설체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의 글을 얻어가려 애쓸 정도였다. 또 그림을 보는 안목과 관심도 남달라, 동진ㆍ당ㆍ송ㆍ원ㆍ일본 등에서 최고 화가 35명의 작품 222점을 모은 수집가였다.
하지만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지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안평대군도 그림도 조선에서는 흔적조차 없는 신세가 된다. 서른 다섯이 되던 해 둘째형인 수양대군이 그와 김종서의 반역을 핑계로 쿠데타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안평대군은 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한다. 직계가족은 노비가 되거나 죽고, 무덤도 기록도 모두 없는 신세가 된다. 그의 컬렉션은 모두 타거나 사라지고, 단 한 점 '몽유도원도'만 남았다. 그것도 흘러흘러 먼 타국 일본 땅에서.
평생 외교관으로 근무해왔고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저자는 지난 2009년 국내로 잠시 들어온 '몽유도원도'를 보며 오래 미뤄온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림이 일본에 넘어간 경위를 따라갔지만 곧 안평대군의 삶과 꿈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는 이 그림이 '조선의 수성(守成)이라는 대업에 참여한 왕자가 자신의 천명을 보았던 한 편의 꿈을 기록한 그림과 문서'라고 결론 내린다.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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