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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6월23일] <1429> 플라시 전투


1757년 6월23일 미명, 인도 서부의 촌락 플라시. 영국과 인도(벵골)ㆍ프랑스 연합군이 맞붙었다. 프랑스 고문단을 포함해 5만명의 대병력과 대포 53문을 갖춘 벵골군은 인도인 병사 2,100명을 합쳐야 고작 3,150명에 대포 9문인 영국 동인도회사군을 압도할 것으로 자신했으나 결과는 딴판. 오전8시, 전투 시작과 동시에 승부가 갈렸다. 참호를 파고 대기하던 영국은 마음껏 총탄을 퍼부었으나 벵골군은 화약이 비에 젖어 대응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영국에 매수됐던 장수들이 내부에서 총부리를 돌렸다. 결국 벵골군은 무너졌다. 배신자인 자파르는 벵골 태수 자리를 차지하고 영국에 모든 이권을 내줬다. 영국은 인도의 지배자로 올라서고 침탈의 근거지를 상실한 프랑스는 대체식민지로 인도차이나(베트남 지역)를 골랐다. 플라시 전투는 경제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영국 면직업계의 최대 고민은 원면 부족. 가공무역으로 수익을 올렸으나 수입량이 워낙 적었다. 원면이 풍부한 인도는 완성된 면제품을 수출하느라 원료를 팔지 않았다. 플라시 전투로 들어선 괴뢰정부가 무한정 방출하는 인도산 원면 덕분에 연간 80만파운드였던 영국의 면직물 수출액은 전투 100년 뒤 3,490만파운드로 늘어났다. 수요급증에 부응하기 위해 면직업자들은 기계화를 도모하고 종국에는 전부문의 산업혁명으로 퍼졌다. 인도산만으로도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영국은 이집트를 침략해 원면 공급지로 삼았다. 미국에 흑인노예제가 성행한 것도 영국의 면화 수요에 기인한다. 영국이 성장하는 동안 인도의 면직산업 기반은 완전히 붕괴돼 최대 수출국에서 최대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플라시 전투의 배반자가 없었다면 인도의 식민지화와 영국의 산업혁명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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